믿음과 행함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5. 15:42 Writer : 김홍덕

이원론적 관점이 보는 믿음과 행함



또 하나,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원론적 사고에 있다. 믿음과 행함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삶은 자연적으로 성경말씀을 지키면서 살게 된다.’고 말을 하면 믿지 않는다면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는가 하면, 믿음이나 행함은 분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중요하냐? 행함이 중요하냐?”>라고 묻고, 답하고, 어느 것일까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철저히 믿음과 행함을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행함은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용이니 그것은 당연히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이원론적인 창조를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어떻게 세 분(위)이 하나가 될 수 있지?’라는 의문이 잔존하는 것 역시 같은 관점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다른 개체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나타나심은 의와 뜻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참 뜻을 깨닫게 감동케 하시는 영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창조하신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일을 담당하시는 역할에 따라 표현되심이 다른 것을 삼위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성경을 보는 전반적인 오류 혹은 착시인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팽배한가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술 마시는 것이 죄인가?’, ‘노래방 가면 안 돼?’와 같은 의문으로 표현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질문은 모든 교회에 숨소리처럼 존재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끝나지 않은 의문이다.(노래방이나 술 문제는 우리 교회에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원한다면 그것 아니라도 그렇게 이원론적인 가치관은 얼마든지 찾아 줄 수 있다.)


왜 그런 문제들,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이원론적 가치관이냐 하면, 술 마신 것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두고 ‘선’하냐? ‘악’하냐 하는 둘 중에서 결정하는 것과, 그 결정이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하나의 행위가 선이 되든지 악이 되든지 두 가지(이원) 중의 하나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제대로 된 신앙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술을 마셨다는 행위보다는 왜 마셨는지가 중요하다. 술을 마시도록 한 내용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직업이 소몰리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직업을 가지지 말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살인은 무조건 죄라고 치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행위 하나를 두고 선이냐 악이냐 판단하고 그 결과 선하다고 인정되는 것만 하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원론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선악과가 끊어 버린 내용과 형식의 연결고리



사람들이 그렇게 사람의 행위 하나를 객관화하고 나서 그 행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판별한 후에 선하다고 판정된 것만 하는 것인 신앙이고 선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벗은 자신의 모습은 그저 부끄러운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생각 이후에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 그 자체, 행동과 행위를 선악의 기준으로 나누고, 선으로 결정되고 동의한 것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스스로 사람의 행동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 어느 하나가 사람 안에 없다면 어떻게 나누겠는가? 모르는데. 그리고 그 선악의 기준에 합당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기준으로 보면 서방세계에 대한 테러가 선이고, 서방세계에서는 악이다. 비단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교계의 총회나 노회의 다툼 역시 같은 구조이다. 문제나 사건은 하나인데 어떤 이는 그것을 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정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한이 아니라면, 자신의 본분이 아니라면 외칠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즉 그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관점,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보이는 행동을 판단하는 관점이 이원론이고 그 관점으로 보면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사람이라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아무리 다양해도 한 사람에게서 나오고, 모든 인류가 각각 다양한 삶을 살아도 결국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 사과가 아무리 많아도 다 사과지 그것이 좀 파랗다고 큰 매실이 되지 않지 않는가?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을 알면 사람의 행동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온전한가 하는 것이 쟁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일원론이다. 즉 사람이 존재의 목적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존재 목적에 맞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맞는 시계와 시간을 알려 줄 수 없는 시계는 모양이 같아도 다른 존재인 것이다. 하나는 시계고 하나는 고물일 뿐이다. 이것은 같은 하나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선한지 아닌지의 문제인 것이다. 목적에 맞는 존재, 그렇지 않은 존재 이 둘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같은 것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들이 믿음과 행함을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다면 반드시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따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생명이 다른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급하다고 ‘멍멍’하지 않듯이, 사람이 하는 하나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내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다. XY염색체와 남자가 같은 것인 것과 같은 것이다. 강아지의 DNA와 사람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개의 DNA가 믿음이라면 개가 사람을 따르는 행동이 믿음의 행함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눠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야고보 사도께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영혼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사람 안에 내용과 같이 본질로 자리하고 있으면 생명이 행동으로 표현되듯이 자연스럽게 지켜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다 되겠느냐?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지’ 한다면 신앙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단언컨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처럼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인하여 본성처럼 살아본 순간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 결국은 율법주의 아니면 영지주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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