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잉태되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육신을 사실대로 표현한 것은 마태복음이고, 그렇게 잉태되심으로 이 당에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미 곧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이 형식으로 되는 과정이 바로 성령의 본분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게 하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을 어려워하고 때로 두려워하는 것은 영이라는 측면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분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영역에 대하여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이기에 사람이 볼 때 두렵고 놀라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본업이 아니시다. 성령의 본업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감동(感動)>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과정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님이다. 사도행전에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구원받을 이름이라는 것은 구원받을 생명이자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한 법이 있다. 그냥 ‘오늘부터 내가 예수 믿는다.’며 작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신자로 등록한다고 예수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심령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우리의 심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나 업적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일을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사람에게는 어쩌면 산을 옮기는 능력보다 본성이나 성격이 바뀌는 일, 즉 사람이 바뀌는 것이 더 기적이기 때문이다. 산을 옮기는 것이야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의 몇 가지 기적을 따라했듯 포크레인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사람의 밖의 어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이나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은 얻을 수 있어도 마음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마음 안에서 변화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아는 이야기처럼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하게 하여 스스로 덥다고 여겨 벗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에 결정적인 감정이 바로 감동이나. 그 감동이 없으면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어떤 계기로 자기 마음이 바뀔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요일에 놀던 사람이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이 사람 밖의 조건만 바뀐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오늘부터 예수 믿노라 선언한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의 절대적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 마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 안에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는 사람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야 한다. 땅이 열매를 내려면 씨가 심겨야 하고, 여자가 아들을 낳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즉 사람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받아 들였을 때 그 받아들인 것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감동의 역사가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일 때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보이신 것을 볼 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계획대로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마음 안에 마치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지고, 그것이 잉태되어 생명이 되게 하는 감동의 역사를 성령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이며 이미지고 감동이고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 땅에서 보이신 모습을 읽고 들을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심겨져서 그것이 다시 자기 삶의 내용이요 본질이 되어 표현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의 본질이 바뀌도록 예수님이 보이시고, 그 이미지가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뜻이 한 사람의 본질이 되고 삶의 내용이자 목적이 되어 삶이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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