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4. 16:59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본성이 표현되는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서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육신의 의지를 가지고 지켜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그게 그것 아닌가 싶겠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말씀을 지켜내는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된 사람은 안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표현되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을 지켜 행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육신을 변화 시키면 생명이 바뀌어서 천국에 가는 정체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감동이 심령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안에 자신이 본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내는 생명이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그 모습을 보고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의가 생명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놋 뱀을 본 백성들이 본 것은 뱀 모양의 거울(당시 청동은 거울의 재료)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뱀의 모양으로 비쳐지는 것을 본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뱀에게 물려서 죽게 된 자리에서 치유가 되었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게 되었듯,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되어 있는데, 뱀 곧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것이 바로 죄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잘 되지 않지만 성경의 말씀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삶을 보니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의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행동과 삶의 모양을 주관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은 안 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반대로 안에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이 나타나고 표현되는 사람은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차원이 다른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행함은 믿음이 표현되는 것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기도 안 해도 된단 말인가?’라든가, 아니면 ‘그게 어떻게 되는가?’ 라든가, ‘그럼 마음으로만 믿으면 행동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사실 그런 답을 들을 때 마다 ‘어떻게 이렇게 짜 맞춘 듯 같은 생각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바 된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약 2:18-19)


사실 이는 놀라운 것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함은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행함과 믿음(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신앙의 행함은 심령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는데도 듣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도 영혼이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듯이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말씀을 전했는데 동일하게 행함과 믿음을 분리해서 반문했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기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본성이 행함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하나를 두 개로 나누어서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라고 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나 행함이나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나누어서 행함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이러한 논제가 아니어도 경험이 없는 사람은 믿지 않고 오히려 말이 많은 것이다. 즉 자기 안에 행함으로 또한 삶으로 표현될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다면 자기 안에서 삶으로 표현되어지는 그 본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식욕이 훈련에 의하여, 참고 버티듯 철야기도 하듯이 익힌 것이 아니듯이, 심령에 성령의 감동으로 거듭난 생명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이 그 의의, 믿음의, 말씀의, 생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져서 그것이 빛과 물로 싹이 나듯 성령의 감동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되어 행동과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과 삶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이 그리스도인(a christ)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은, 유전자가 같은 생명을 가진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같은 본성 안에 있는 삶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손에 쥔 사과가 사과(라는 세계) 안에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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