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8. 11:09 Writer : 김홍덕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범죄가 발생해서 범인을 수사할 때 기본 중의 하나가 그 범죄로 인하여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범죄 발생의 원인이자 목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결국 누구의 이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하신 목적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가진 믿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과 같다면 온전한 믿음일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것인가를 이야기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쓴 소리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이익이 육신의 삶에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잘 되는 것이 믿음의 주요 목적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풍요해지면 그 풍요로움을 가지고 교회와 선교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런 선순환(?)의 결과로 천국에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과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는다는 교묘한 당위성으로 포장을 한 체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사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이나 이론을 믿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믿는 신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이 다른 신보다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같은 문제지만 하나님께서 더 잘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장 논리다. 교회와 작금의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생은 다 육신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신이 필요합니다. 그 신 중에서 하나님이 으뜸입니다. 가성비도 최곱니다. 사용법(믿는 법)도 쉽습니다. 제사 같은 것 안 드려도 됩니다. 쉬는 일요일에 와서 다소 지겹고 졸리운 이야기를 들으시고, 혹시 이해가 안 되시더라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인 줄 아시고, 그 값으로 약간의 헌금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지만 가난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헌금으로 밥 먹고 사시고, 그 보상으로 여러분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될 뿐 아니라, 죽으면 천국에 가서 호의호식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쉽죠? 여러분!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한 이런 저런 사람들의 사용 후기도 이렇게나 많습니다.” 라고.


표현은 비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이라는 것이다. 정말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면,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누구에게 유익인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정말로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는지, 아니면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의 평안과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보장이 신앙의 목적인지를 살펴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을 살면서 그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얻는 창고지기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온전한 것인가? 하나님을 진정 전지전능한 신으로 믿는다면, 어련히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이 육신에 필요한 것에 대한 대비도 없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 해결, 삶의 평안,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의 수혜자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그냥 믿음의 부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람 자신을 위하여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 보이는 모든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으로 표현된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있게 한 의(義)가 있고, 그 의가 표현된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이라는 것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TV가 본질이 아니라, TV를 통해 보는 영상물 속에 그 영상물을 제작한 사람들의 의도가 본질이듯. 늘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TV는 절대 본질이 아니다. 누가 TV를 장식용으로 사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 TV를 사는 사람은 TV를 통해 볼 영상물 때문에 사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TV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듯 이 세상도,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집착하고 염려하는 인생사도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질로 알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육신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모든 것이 형식을 본질로 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사람을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영광 받으신다고 하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다. 그러면서 교회에 사람 데려다 놓으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고, 교회를 잘 지어 놓으면 사람이 온다고 한다. 그것은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생명의 방향성이 아닌 것이다. 똑같이 사람이 교회에 새롭게 오는 것도, 먼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서 자기 마음 안에서 ‘저것이 인생의 본질이구나!’ 깨달음으로 인하여 온 것과, 전도하라고 하니 데려다 놓은 것은 교회에 왔다는 것은 같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생화와 조화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할 때, 하나님을 믿으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육신의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있게 한 하나님의 의가 나의 본질이요, 나의 존재 목적이며, 삶의 의미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그런 믿음은 아무렇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믿음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마귀가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하는 시험을 물리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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