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7)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30. 14:35 Writer : 김홍덕

믿음은 수동적인 것


믿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사람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정하고 그렇게 되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믿음은 아주 수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믿어야 할 것을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가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번에 좋은 직장에 지원했는데 합격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와 같은 것은 믿어야할 것을 사람이 정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믿어야할 것을 정하면 하나같이 육신의 삶에 대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가 이런 신앙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믿음과 신앙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작금의 믿음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믿음의 본질도,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이나 대상도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이 자기 필요에 의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육신의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믿음이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를 취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네가 누구냐?”하는 것을 고백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사람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고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무엇을 만들 때, ‘어디에 쓸 것인지’를 정하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즉 내용이 정해지면, 목적이 정해지면 방법이나 용도 그리고 모양이나 기능 그리고 결과까지 정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만 자기 안에서 정해지면(믿어지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내용이 믿어지면 형식은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거나 만들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아주 순종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운명을 믿는 것이다. 그 사람의 운명, 곧 사람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 아니 창세전에 정하신 것이다. 사람은 단지 그것만 인정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 그것만 믿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다. 이것을 부인할 것이면 성경을 읽을 이유조차 없다. 하물며 믿을 필요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감추고 싶었던 사람의 본성



사람이 순종해야할 사람의 정체성도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태어날 때 가진 사람으로서, 인생으로서 가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는 것을 고상한 것이라고 하고, 극복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담이 자신을 부끄러워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이 가진 식욕이나, 성욕이나, 운전하다 욱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다 아담이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이기려고 평생을 수고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아무도 완벽하게 성공한 이가 없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시도한 이들 중에서는.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감추려 한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감추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난데없이 ‘그러면 그것을 자랑하란 말이냐?’라고 반문한다. 인정하는 것과 자랑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랑하는 이가 있다면, 인간을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성욕이든 식욕이든 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든 다 표현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 있다.(말로하기 어려운 구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구나!’ 하는 것과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쩔래?’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인하는 것과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과,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 안에 성욕이 있구나!’ 인정하는 것과 아무렇게나 성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정한다면 다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집행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남은 것은 당연히 자신이 결론을 낸 것에 대한 심판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다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연약함이 어떻게 쓰이느냐 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수동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집행하는 능동성이 믿음이 아닌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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