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복음) 5:21-26 먼저 화목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30. 15:05 Writer : 김홍덕

또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 곧 제사 드리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또 하나는 길에서 송사하는 사람과 함께(만나면) 있으면 그것(송사)부터 해결하라고 하셨다. 하나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고 하나는 세상의 재판관이 재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먼저 제사를 드릴 때에 형제가 나에 대하여 원망(영어 성경에는 반대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화해하라고 하셨다. 이는 누가 내가 제사를 드리는 것에 반대하면 이를 화해하라는 말씀이다. 즉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형제가 반대나 원망하는 것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형제가 볼 때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율법이 자기 안에 완성된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것을 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리라 인정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군에 있어 실세들이다. 즉 적군의 장수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진정한 제사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예수님의 제사는 그 어떤 사람도 반대하거나 원망할 것이 없는 제사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롬 12장), 산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아니면 제단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제사가 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인데, 이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져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임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에 있어 형제가 반대할 것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그들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제사고, 그것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율법의 목적이 완성된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 재판 받을 일 또한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색다른 말씀 같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말씀의 중요도도 중요도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신앙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아무렇게나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비하여 하나님의 안목 안에서 절대적인 존귀함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존귀함은 신앙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위한 자격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을 섬기기 위한 존귀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 이상해지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깊이 알수록 이단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주 이야기 하지만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은 세상의 법으로 지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송사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이런 것이다. 이 송사하는 자는 형제가 아니다. 그냥 길에서 만난 사람이다. 성전이나, 가정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법이 있다. 그 법이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 없는 것이라 해도 그들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송사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법과 율법을 다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니냐?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송사다. 그냥 세상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과 관련한 것이다. 신앙과 관련해서 길가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한다는 것은 나의 신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송사당할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죽은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것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죽은 자 같은 사람들을 죽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아들과 같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존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자와 같아서 그 격과 존귀함이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나지만, 그 차이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한 차이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괴롭게 하여 송사를 당할만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일들이 많다. 교회가 소송을 당하는 일은 고사하고, 목사가 여러 가지로 언론에서 송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 일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또 교회가 그것을 제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서 왈가왈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격이 다른 일이고, 세상에서 뭐라 해도 하나님의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철 없는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완성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 사람 안에 온전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죄인이 되어 그들을 섬긴 것, 그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송사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섬기는 것을 위하여 먼저 알게 하신 것이다.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길 가는 사람에게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하겠는가? 그들을 섬기는데? 그들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고, 종 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데 어떻게 송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