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7:20 율법과 복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8. 13:34 Writer : 김홍덕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과 각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한국이나 여타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에서 율법은 생소한 것이다. 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율법의 시대로 알고 있는 구약 이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다음에 이스라엘 밖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계명이나 레위기에 나오는 각종 규례들을 이해한다거나 특히 그것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율법은 자신이 신앙을 가지기 이전 시대인 구약 성경 시대의 규례이고, 자신은 율법과 무관한 나라에서 신약 시대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도올 김영옥 교수가 한번은 강의하면서 '한국 사람이 자기 역사도 모르면서 이스라엘 역사책 같은 성경을 공부한다.'며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무식한 소리이다. 그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읽고, 또 얼마나 신학적 역량이 출중한지 몰라도, 그 사람은 심청전을 인신매매가 미화된 소설로 보는 사람처럼 성경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시대적으로 구분해서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이고, 달력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약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 기독교인들, 바로 그들이 더 심각한 문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과정과 교리의 뿌리는 외면하고, 마치 답만 외워서 시험을 치는 사람처럼 신앙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그런 삶을 신앙의 삶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지키고, 어떤 것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지키는 것과 같이 변형하고 내용의 일부를 버려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30대에 접어 들 무렵, 지금은 목사가 된 친구와 율법에 대하여 밤샘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주장은 왔다 갔다 했다. 예를 들어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수익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십일조로 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안식일은 시대에 맞게 일요일에 지키는 것이 옳다고 했다. 안식일이나 십일조나 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래서 묻기를 '그렇다면 십일조는 있는 그대로 지키고,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로 지킨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안식일은 시대에 맞게 지키는 것으로 분류하고,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으로 분류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질문 이후에는 토론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대답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옆에서 자던 친구들마저 일어나서는 목사가 된 친구에게, "그 구분점이나 이야기해라, 시끄러워 못자겠다."고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명확한 답은 없었다. 


율법과 복음은 하나의 목적으로 연결된 것이지 성경이 기록된 시대나, 그 내용이 구약에 있느냐 아니면 신약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은 순서가 있다. 기록된 것으로 보면 율법이 먼저이고 다음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보이지만 실제 순서는 그 반대이다. 복음이 먼저이고 율법이 다음이다. 이것이 한 사람 안에서 명확하게 되지 않으면 율법도 복음도 모르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조상인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율법과 복음의 관계와 역할을 아는 것이고, 생명을 아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이고, 복음이 율법보다 먼저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자. 미래형 자동차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화석연료도 사용하지 않고, 운전자도 필요 없이 전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하고 오랜 연구 끝에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미래형 자동차가 먼저인가, 아니면 그런 자동차에 승차하는 사람 곧 그런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와 생각과 계획을 가졌던 사람이 먼저인가? 그건 당연히 계획을 가진 사람과 계획이 먼저인 것이다.


율법은 마치 자동차의 본체와 같은 것이다.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이 이동을 편리하고 빠르게 해야겠다는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목적과 의도가 자동차로 표현된 것이다. 우주로 가겠다는 계획과 꿈이 있었기에 우주선이 만들어지고 발사되어 우주로 가는 것이다. 우주로 가겠다는 것 그것이 당연히 먼저인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이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은 복음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상태가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말을 하면 복음이고, 그런 사람이 살아가면 복음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목적하신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와 나라가 되게 하고자 하심에 있다. 그것이 먼저 있었고, 그 먼저 된 뜻을 좇아서 천지를 만드시고 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아담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계획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표상이고,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결국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는 것에 있는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율법의 어떤 것을 다 지켜 행하였다 해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즉 율법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율법보다 복음, 곧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라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만 나오면 율법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인 것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말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원숭이가 숟가락으로 밥 먹는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똑똑한 개가 걸레질 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에 하라고 명한 모든 것들은,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금하려 하고, 못하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협박하고 핍박해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보여주는 모습을 다 기록했더니 성경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지켜 행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예수님도 호리라도 남김없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지키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도 다 율법이다. 시대나 신구약 어디에 속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또 누가 말 했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행함으로 지켜내려 하면 다 율법인 것이다.


반면에 그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과 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생명과 같이 있어서 그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의 본성만 있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삶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알고 성경을 그렇게 보면 구약도 아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천지만물이 다 복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은 율법이 완성된 삶이다. 먼저는 생명이 표현하는 행동은 그 생명에게 있어 온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듯,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위하여, 그것을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의 어떤 말씀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지키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나왔다는 것은 마치 우주선이 제대로 궤도에 올라갔다는 것이기에 율법의 모든 조항이 다 완성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도 하고 반문도 하지만, 율법은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생명이 그 안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에 지켜야하느냐 안 지켜도 되느냐는 식의 접근은 그런 사고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을 행함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율법이 지향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율법이 없으면 복음에 이를 수 없다. 우주선에서 버려지는 1단계 로켓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 율법이 없으면 복음은 없는 것이고, 또 율법의 완성은 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율법은 1단계 로켓을 버림같이 버려지지만, 궤도에 올라가는 목적 안에서 율법은 또 완성된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삶은 참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또 도망 다니듯 해도 성경을 또한 율법을 다 지키고 이루고 있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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