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 소금과 빛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6. 12:54 Writer : 김홍덕

◯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서 말씀하실 때 나아온 제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모든 요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은 그 짠맛으로 인해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소금이 가진 형태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소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금이 가진 하얀 결정체로서의 모양은 소금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소금이 가진 짠 맛 때문이다. 그 짠맛은 소금이 결정 상태로 있어서는 절대로 낼 수 없다. 녹아서 그 형태가 없어질 때 그 때 비로소 소금이 소금다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고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소금이 짠맛은 없고 그 결정체인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없이 신앙의 형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형식은 녹아 없어지지만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육신의 삶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소금이 녹는 것과 같은 육신의 소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과 연관이 있다. 소금이 녹아서 맛을 내는 것은 삶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비와 투자가 착한 행실이 되었을 때 소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착한 행실은 공통된 가치관이 아니다. 그러니까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가치관에서 볼 때는 착한 행실이고 어떤 가치관으로 볼 때는 극악무도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폭탄 테러는 시도하는 가치관에서 보면 순교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극악무도한 테러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누구의 관점에서 볼 때 착한 행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착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착한 행실로 여기시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삶이라야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그런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그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맛인 것이다. 그 맛, 즉 소금이 녹아서 형태가 없어지듯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맛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것을 착한 것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맛으로 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자신을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표본이시기에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소금이 가진 그 결정의 모양이 짠 맛을 가진 것이 아니듯,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과 방법과 형태가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다. 소금은 그 모양이 어떠해도 짠 맛을 내듯, 사람의 삶도 생긴 것이 어떻던, 어떤 행함으로 공로를 세우든 그런 것 때문에 짠맛이 나듯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 목적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짠 성분인 염화나트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또 부패하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금과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맛을 찾기 원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 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고 하셨다.(영어성경에서는 촛불을 감추지 않고 촛대에 꽂는다고 함)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전해지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기능, 빛과 같은 본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 능동적이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동적 형태를 한정하는 말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간과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의 근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또 말씀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서울역에 가서 전하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이라 빼 놓더라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너무 능동적인 열심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냥 길가는 사람, 하나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마구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적으로 전하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들으려 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싶고, 또 필요로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을 보고, 또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볼 때, 정말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빛을 높이는 것이 빛이 높이 서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향만 바꾸면 누구나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낮은 땅,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런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이건 겸손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애굽의 가치관이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출애굽이고, 그것이 인간의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리가 바로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로 가는 것이다. 즉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천한 동네, 그리고 사람의 낮은 자리가 바로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회복하는 것, 제 자리를 찾아 가는 것, 그것이 자리를 벗어난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자리가 낮다고 하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낮은 자리이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자리가 영광스럽고, 죽음 가운데서도 살려낼 정도로 존귀한 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관은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귀함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리에서는 외칠 것이 없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있었기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이니 병을 고치신 것이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등불이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가듯 능동적인 성과를 내려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소란을 떠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말씀으로 무조건 전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시미청전을 문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사람이 때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라는 것이지, 시간 정해서 전도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능동적이고 주입식이 아니라, 보고 배울 것이 있게 하므로 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NCIS라는 미드를 아주 좋아한다. 그 안에 주인공인 '깁스'라는 보스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극중에서 그는 부하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보고 배우게 한다. 또 실수를 지적질도 하지 않는다. 알고 고칠 때까지 자신이 대신 수고한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해서 그 미드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보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은 인식이라 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그 본이 된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빛,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해서 어떤 세계를 알게 한 그 빛, 그 사람의 삶을 모든 집을 밝히듯이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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