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팔복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3. 15:20 Writer : 김홍덕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것이 청결(헬 : 카다로스)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청결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채워져야 할 것, 그리고 그 채워진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사람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장, 눅 11장) 즉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채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 청결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끗한 것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채워졌을 때 그것이 바로 청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 우리 안에 채워졌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청결하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채워져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처음 존재가 누구신가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하게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정말로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또한 그런 사람을 알아보기에 그런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대접하였고, 야곱도 에서를 만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며, 그런 사람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마음 안에 있어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것이 온전히 마음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평화인데 그 의미는 평화라는 것은 서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일 때 평화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평안하뇨?'라고 하실 때 그 평안이 바로 이 에이레네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형체가 없으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유전자)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표현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시고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안이고 화평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평안이 되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화평이고 평안인 것이다. 에이레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오코'라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뜻을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의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핍박이 수반되어도 따라 간다는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 의를 옳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탈북하여 남쪽으로 오는 것을 의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과정도 의를 좇아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 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의인 민주주의를 좇아 온 사람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들 핍박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를 따라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곤고함이라는 것은 핍박이 맞지만, 예를 들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떼를 쓰다가 그 사람들이 한 소리 하는 것은 핍박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핍박이라기보다 자초한 일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벌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또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 의를 좇아가면서 겪는 곤고함은 수고와 희생의 곤고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아니라, 의를 따라가다 보니 감당하는 곤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곤고함이 바로 다른 사람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 그런 원인인자 없이 당하는 곤고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함으로 받는 반사작용을 핍박이라 하면 곤란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핍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군사들로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서 처형당하신 그런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핍박이다. 그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시끄럽게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육신의 수고와 비난과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과정이 표준이다. 그렇게 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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