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팔복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3. 11:28 Writer : 김홍덕

◯ 우리가 산상수훈으로 알고 있는 말씀의 시작은 팔복으로 시작한다. 이에 앞서 보면 이 산상수훈의 시작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온 사람들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것을 듣고서, 천국 복음을 듣고자, 또한 병을 낫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보고자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니 제자들이 나왔다고 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는 것, 즉 제자들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먼저 사시고, 그 사심을 보고 들은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라'하시니 그들의 마음이 동하여 제자로 따라 나서는 그런 관계이다. 지금 이 산상수훈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듣고, 병이 나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르치신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제자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가르친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는 가르치는 이의 삶을 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땅에 씨가 뿌려지듯 심겨져 그것이 싹이 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가고 그렇게 제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있어 사람의 삶이 빠지면 안 되는 그런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이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시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가 흔히 <팔복>으로 일컫는 말씀이다. 팔복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헬라어 프토코스)은 절대적인 빈곤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절대적인 빈곤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그런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빈곤하게 된 과정보다 다시 일어서기 힘든 지경이 된 가난에 의미가 있는 그런 가난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함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 곧 마음과 영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어떤 것을 자기 안에 채워 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대변된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워서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뭔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이 가난해지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이 가난함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가난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상태라는 것은 자신이 그 빈곤을 채울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람 스스로 채운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기 안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의 속 심령 안에 어떤 것도 스스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이 저희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공허함, 살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공허하게 하는 '왜 사는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그 공허함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의 모든 것으로 자신의 가난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것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자기 안에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의 공허함,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원래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채워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지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은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서 비롯된 유흥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빈곤과 같이 사람으로는 어떻게 채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가 채워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가난, 사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람의 공허함이 원래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몇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펜데오라는 헬라어는 헬라어 중 가장 극심한 슬픔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애통하고 슬픈 이유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수고한 노력의 결과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일부로 자신의 사랑으로 여기던 것을 잃어버려서 이제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애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애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 그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은 그 인생의 의미가 없어진 애통함, 그 극심한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돈이나 명예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에 두고 있다가 잃어버린 그런 애통함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사람이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통한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여 애통한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를 찾을 것이고, 자신이 비롯된 뿌리를 찾고자 할 것이며, 그것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으로는 그것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너무 애통한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한 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위로>라는 것은 등을 두드려주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가까이 부른다.>는 의미를 가진 팔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부른다는 것은 같은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리라는 것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는 공간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같은 정체성으로 부른다는 말씀인 것이다.


애통하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알지 못함으로 느끼는 애통함이다. 이런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극심하게 느껴야 하는 애통함이지만 알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오는 것들이 알고 보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만한 것이 그렇게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보편성과는 다른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 보면 된다. 모두는 위한 복음이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하여 순종하는 모두이어야 하고, 그 순종에 관해서 사람이면 가능한 것이기에 모두를 위한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것 보다는, 돈이 없는 것이 더 애통한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공허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운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기(명)가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인데, 사람이 육신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어 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세상에서 사람이 만들고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채우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세상에 있는 재물과 명예에 두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애통해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 부르시지 않는 것이다. 즉 위로함이 없는 것이다.


애통하고 위로하는 것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에 관한 것으로 애통해할 수 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 사람이 왜 살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가난함과 그것이 없어 애통한 마음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존재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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