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팔복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3. 13:45 Writer : 김홍덕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공부에 있어 성경에 사용된 원어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보편성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누가 읽어도 자신의 말씀이 되도록 말씀하신 것이지, 원어나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말씀이 되면, 그것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한다. 그 원어가 주는 의미가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언어로 읽어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경영하시기 때문이다.


이 온유라는 것은 헬라어로 '프라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흥분을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있어 진정제의 약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통상적인 용법은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건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온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정말로 부당하게 취급한 행동의 경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하고, 또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왕이신 이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죽이려고 처형한 형틀이 바로 십자가고 그것을 억울하게 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땅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로 단편적으로 정의하면 그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그렇고, 사람이 자신이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어디서든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넓은 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십자가를 지시는 온유함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 얼마나 넓은 땅을 얻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온유함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에게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더 좋고, 말씀의 계시가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했을 때, 신앙 없는 사람을 훈계하려 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신앙 없는 사람(땅)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얻으려면, 때로 계시가 어두운데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따라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온유함이다. 


그렇게 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더 밝은 것인지를 알게 하실 것이고, 어두우면서 밝은이를 끌고 간 사람이 그것을 깨달을 때 자신보다 더 밝고 분명히 알면서 자신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것을 맞는 것으로 여겨 수고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런 관계, 곧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유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온유함을 아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얻으신 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시기를 그런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얻는 일이 자신의 기업,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사람 앞에서 더 아는 것을 주장하거나 안다고 모르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깨달을 때 까지 그들의 주장에 수고하는 희생을 보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일과 기업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인 것이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에 사용된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인데, 이는 신학적 성격이 강한 단어라고 한다. 이 '의'는 신적 본질에 속하는 속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 단어의 의미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먹을 것, 사람의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이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베고픔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며 육신의 배가 불러진다는 의미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부르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배부르게 채워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 '네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목마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문자로 표현된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듯 해야 하는 것이다. 심청전을 문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심청전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는 것이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것이듯, 성경을 읽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배부르게 채워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즉 그것에 순종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 '불쌍히 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엘레에몬'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나 알듯이 죄에 빠진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누이 강조하듯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대속하신 것이지만,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반복되게 이야기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것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없다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수학박사가 낙제생에게 수학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구조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한 긍휼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나보다 안 좋은 형편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긍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긍휼은 나 보다 못한 사람이 나 보다 더 잘난 줄로 알고 나를 가르치고 심판하려 하는 것에 나를 내어줌으로 그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때 까지 수고하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법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쉬울 것 같지만 무지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는 쉬운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있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 힘든 것이다.


어떤 공동체, 무엇을 추구하는 모임에서는 그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앞선 사람이 늘 있고, 그것을 배워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에 대하여 더 아는 사람이 아직 배워야 하는 사람을 심판하거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나아가서 알 때까지 그 사람보다 더 아는 것이 어린 사람을 위한 수고가 되는 것, 희생이 되는 것 그것이 긍휼인 것이다.


그런 긍휼을 보이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사람이라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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