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8-22 제자들을 부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8. 19:46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후 갈릴리 지방에서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가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따라 오라 하니 그들이 난데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에 매료되어 제자들이 한 순간에 따라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 본다면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 가셔서 사시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바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따라 오라고 하실 때에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 나서는 장면이 뭔가 신비롭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을 좀 깎아 내리는 것 같아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흑암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삶이 그 땅의 백성들에게는 흑암 중의 큰 빛과 같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사 9:2)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절대로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들은 희망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적을 보면서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우린 지금 당장 예수 믿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


물론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이나, 능력이나 십자가를 직접 지는 것과 같은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왜 기적을 보이시고,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알게 하시려 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의 목적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재로 그러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생면부지의 사람을 갑자기 따라 오라고 했는데 따라 왔다?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사시면서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제자들을 불렀을 때 제자로서 따라 나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삶의 기본 본성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삶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심판하신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시면서 보이신 모습,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모습이 사람에게 심판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는 말을 하러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게 하신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그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갈 마음이 동하여 따라 나선 것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갈릴리와 나사렛 인근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난데없이 예수님이 지나가다 부르니까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마음이 동할 정도로 예수님의 삶이 그 마음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 말로만 전하는 그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것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소리일 뿐이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커녕 욕하면서 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는 것은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삶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 것이라고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외침 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행동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니까 성경을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하라니까 서울역에 가서 시끄럽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당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기는 하나 능동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떤 것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 제자로 부를 사람들에게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사람처럼 가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 간다.' 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은 삶을 사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 나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예수님을 믿고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교훈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방식에 관한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도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제자로 부른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이 있었고 그것이 부르시는 음성에 소리굽쇠가 공명을 일으키듯 그들로 하여금 생업을 뒤로 하고 따라 나서게 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또 성도 간에 교훈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감당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 뭔가 말씀 안에서 그 생각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어 복음과 교훈을 전하려 한다면 뭔가를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기까지의 세월과 그 세월을 살아내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말로만 가서 전하고, 교훈하고 심지어 심판하듯 비난하고 패를 지어 수근그린다면 그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아닌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서울역에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서울역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이 지옥 간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아무리 아련하다 한들 예수님의 그 마음 만 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비난하거나 겁주시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당하시면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 주십시오.'기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또 그것을 교회에서 나눈다면서 그것을 모르고 또 때로 죄 짓는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감당하지 않고 말로서 그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진정 계시가 밝거나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미 그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삶을 감당하신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따라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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