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23-25 병든 자들을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1. 09:4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수리아에 널리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리아는 지금으로 보면 시리아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나라든 간에 그 나라가 유대인의 나라는 아니다. 즉 유대 밖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그 예수님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헤롯의 위협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셨다가 장성하신 후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 때 광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이후에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시고 난 이후에 세례 요한이 잡혀가고 난 다음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과정은 어떻게 다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세례를 받으러 가 볼까?' 생각하고 세례를 받고, 또 다른 날은 '오늘은 제자들을 좀 모아 볼까?'하고 나가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어떤 계획과 계산에 입각한 계획된 스케줄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과정은 생명의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12개월 전후가 되면 걷기 시작하고 곧 이어 말하기 시작하고 점점 자라서 뛰게 되고, 학교에 가고 또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계획적이진 않지만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생명의 본성이 그렇게 하나씩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생명이 그런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보는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의 원인과 이유를 연구하고 그 기록을 따라 성지 순례를 가서 그 유적과 흔적을 찾으려 하겠지만, 이 예수님의 행적이 자신의 과정이라고 믿는 사람, 곧 예수님의 행적과 모든 말씀이 자신에게 주관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면 가장 먼저 자신이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게 된다. 즉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광야의 여정을 걷게 된다. 신앙생활을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은 하면 안 되는지를 궁금해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과연 사람이 이렇게 다 지켜내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즉 그렇게는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죽을 때 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의지로는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40일을 금식하듯 하나님에 대하여 엄청난 배고픔이 있을 것이고, 그 배고픔의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듯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정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정을 거쳐내어야 비로소 제자들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마치 강 건너의 일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고백과 간증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생명이 되어서 볼 때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과 안목이 아직 같지 않다는 것이지, 그것이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에 만화가 올라왔는데, 군 복무기간이 줄어든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이 자신이 할 복무기간보다 더 긴 복무를 한 예비역인 형에게 자랑했지만, 형은 하나도 부럽지 않는 모습을 올려놓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예비역인 것이다. 예비역이 아니면 그 기분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런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생명이 자기 안에 없으면 알 수 없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을 보고 그것이 실제가 되었을 때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된 모습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경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약간의 유익은 있겠지만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을 만나는 것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여정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은 이것을 아무리 읽어도 또 설교를 하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이 기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던 영적인 질병들이 고쳐진 것을 체휼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이 2,000년 전에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실존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읽고 들으니 그것이 자신의 여정이고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본연의 목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예수님이 오셔서 육신의 병을 고쳐주셔야 하는데 그런 일은 잘 없다. 잘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자기 안에 영적인 질병, 육신의 질병으로 그 증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질병이 있는데 이것이 고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영적 치유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과정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셨기 때문이다. 그 삶이 전해져서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나오니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사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러 오니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전해지고 병든 것이 고쳐지는 것이 어떤 과정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것이 나가서 전하라고 하니 가서 외치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나가서 신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 사람과 같이 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되면 그들도 삶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과 같이 영적 질병이 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가졌는가 하면 애굽의 가치관이나 광야의 율법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돌로 떡을 만들 듯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육신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게 되고 그런 소망이 그들 안에 있는 각종 질병들이 다 나음을 받게 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질병을 고치는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연의 목적이고 뜻인 것이다.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치유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의 치유나 전자책 '나를 치유하는 성경'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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