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부터 마태를 부르시고 또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까지 계속 보이시고 말씀해 가시는 내용은 주제가 있다. 지금 마태복음이 전개되고 있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시고 산상수훈을 하시고 내려오시는 일련의 행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형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두 부류, 하나는 심령이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그들 인생의 본질과 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한 부류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같은 부류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 곧 본질이 아닌 형식과 행위를 중요하게 보는 그 가치관으로 예수님과 대칭점에 서려하기에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다.


지금 막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육신을 가진 인생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건 북한에서 자유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고 거리에서 외치는 것 이상으로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다. 서기관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태복음의 진행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또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실 때 까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저항이 없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신 중풍병자의 회복에서 부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즉 그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선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의가 다르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차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유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목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하고 죽은 것과 같은 것이 무엇이며, 그러한 것과 사람의 정체성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들은 의가 다르면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즉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같은 의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 앉았다는 것은 그들과 의가 같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세금이라는 것이 로마에 상납할 분량만 정해져있지 얼마를 거두는지는 전적으로 세리의 몫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10원을 내게 되어있다면 100원을 거두든 1,000원을 거두든 상관하지 않았고, 세리는 그것으로 착복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그야말로 매국노와 같은 죄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 앞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은 그런 고백이 없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누구나 그들을 다 매국노 세리와 또 버젓이 성경에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기록된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보고 있음에도 예수님과 식사하러 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 즉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인이라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것을 인정하고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인인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죄인이라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심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이 공개되어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지금 마태의 집에 모인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 되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신성모독 죄를 선고함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성경이 사람이 죄를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이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기준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법으로 볼 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다. 즉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리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 유대인들이 세리와 창녀를 죄인으로 보는 그 율법적 관점이 세상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의 내용인 의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율법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은 사람의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죄인이 되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서는 항상 죄인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도 성공한 사람이 언론에 보도되고 영광을 받는다. 그건 좋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다 죄인이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을 받는 것은 사람이라는 연약한 본성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공의 기준은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을 할수록 성공하고 영광을 얻는다는 법이 승자와 의인을 만든다는 것이 기준이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면 할수록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을 흙을 굽워 단단한 벽돌을 만들 듯 하는 것이고, 그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러는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세상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기준 앞에서 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의인이 되는 기준에 나는 적합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육신이 가진 한계와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늘 자책하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렇게 되지 않은 스스로를 비판하고 좌절하면서 다시 그렇게 해 보려고 하고 또 다시 실패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세상의 기준 이상의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세상의 법이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그런 법에서 볼 때 다 죄인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그런 법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모임으로 드러내고 인정한 것이다. 요즘말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 바리새인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그 죄로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죄에 대한 개념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이시기고 갈등이 본격적으로 생기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적인 가치관, 곧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죄인을 만들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기준 앞에 사람이 그것을 육신을 가진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하고 바리새인들의 기준, 세상의 기준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 그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이 가진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이시고 전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며. 그것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바리새인과 마태의 집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 중에서 누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먹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를 같이 나누는 그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율법을 주신 의미와 목적을 알아 완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 바리새인과 세상의 기준에서 죄인이 된 그들에게 의인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에 의하여 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 병든 자와 같은 자가 된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의원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도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