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여기서 금식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행위가 아니라 본질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들으면 과연 그래도 되는가 생각하고 또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블로그를 보고 있는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통은 예수님께 병자와 같이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면서 말씀과 의를 품은 기적을 보이시고,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시비를 걸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구조가 많은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하지 않느냐며 질문을 하고 있다.


앞에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포스팅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는 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상징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인생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출애굽 시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맞추어 가고 서고 살듯이 광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처럼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일렬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살게 되는 신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 신앙의 여정에서 두 가지 큰물을 건넌다. 하나는 홍해라는 바다, 곧 세상을 거쳐내고, 다음은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바다는 늘 말하듯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홍해를 건널 때는 바닷물이 갈라져서 바다의 밑바닥을 걸어서 건넜다. 그것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들어갔는데 그 안에 있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피라미드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한 바다 같은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물세례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광야의 삶과 같이 어떤 소리(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맞추어 행동 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음식 먹는 것, 가고 쉬는 것에 이르기 까지 다 신호와 같이 명확한 행동 규범으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또 하나의 세례 곧 성령 세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것에 대한 반항이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렇게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게 하시려 한 것과 같이.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은 다르다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 할지 모르지만 거의 예외 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한 것과, 세례 요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물어보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렇듯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야말로 생수가 자기 안에서 넘치듯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이 없고, 생명이 심령 안에 있어 의지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생명의 본성이 삶을 주관하므로 성경 말씀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많은 의문과 불신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지나서 보면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이것을 안다고 그런 과정을 건너 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죽을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죽어야 하느냐고 의심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이라 말씀하셨다. 신앙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역시 의심이고 반문이다. 이것을 요즈음의 말로 바꾼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자연스럽게 지키면서 살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것과 같은지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하여 답변하시면서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신랑이 없는 것이 금식의 상태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금식을 하는 이유도 신랑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신랑이 혼인의 목적이고, 혼인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신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 심령 안에 혼인잔치의 신랑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굶을 이유가 없는 상태이고, 또한 배부른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런 모든 말씀은 다 한결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스스로를 표현하셔서 그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목적과 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성품을 표현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목적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기적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같은 삶을 사는 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고, 그 삶이 그 목적, 그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기에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나라나 문화에 살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인간이라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본성으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존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삶을 주관하는 의와 본성으로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삶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또 금식하듯 애쓰지 않아도, 또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화가 있어 보는 이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말씀만 온전히 깨달으면 성경의 말씀을 다 행하며 살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나,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는 그런 형식을 지키지 않고, 그런 종교적 노력을 하지 않느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자신의 삶이 그 생명으로 주관되고 있다는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있다면 바다는 절대 잔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없듯 신랑이 없는 것이므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은 것이 있다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그런 삶을 사는 자리까지 가서 그 삶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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