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8 중풍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4. 23:28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마가, 누가복음에도 다 나오는 말씀이다. 마가와 누가에서는 천정을 뚫고 병자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단순히 중풍을 고쳤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악한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싶었으나 예수님께 갈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셨는데 그 고치시는 말씀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는 서기관들의 생각과 함께 엮여서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매우 놀라고 예수님을 참담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히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고 하는 것이 참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절도나 살인과 같은 것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한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악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 악한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 서기관들은 창녀나 세리와 같은 이들을 악을 범한 죄인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기관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실 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중풍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아픈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소경에 대하여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몸이 아픈 것이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다. 물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같이 죄에 대한 벌로서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런 것도 교훈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시니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중풍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중풍이라는 것은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풍이란 것이 사람의 생각은 멀쩡하지만 그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듯,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주관하지 않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만난다는 자체가 중풍이 고쳐져서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는 상태가 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라는 것을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오고 만나서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 목적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죄를 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오신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나려고 온 중풍병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소망한 것임을 보시고 회복케 하신 것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것이기에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가장 쉬운 말은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기관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가치관에서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 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들렸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 그것도 나사렛의 천한 동네에서 나타난 허름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칭하니 그것이 엄청난 참담함으로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생각이 악한 것은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사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사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스스로 가진 기준이다. 즉 스스로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규정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또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당하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그에게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느냐?' 반문한다면 아마 구구절절 이유를 대거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할 이유 없이 살았다고 항변하겠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얼마나 스스로 가치기준을 가지고 사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지은 목적을 알고 사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삶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그 자체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의 생각이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중풍이 고쳐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을 고치신다는 것은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의 가치관 안에서 죄는 다른 것이다. 세리와 창녀가 그들에게 죄인이었다. 즉 사람의 행위가 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들은 중풍을 고치는 것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고, 근본적으로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머리의 생각이 몸을 정상적으로 주관하듯이 삶을 주관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중풍이듯, 사람의 행함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율법의 본질은 모른 체 지켜내기만 하려는 서기관들의 관점은 다 중풍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악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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