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23-28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2. 22:5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그리고 인생을 항해한다고 말을 한다. 성경도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다는 늘 세상이다. 땅에서 온갖 물들이 모여들어서 모든 것이 혼합되어서 바다이기도 하고, 또 넘치는 물이지만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바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서 큰물이 모였지만, 정작 사람이 인생의 정체성과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갈증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또한 인생을 그리고 세상을 바다와 같다고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시는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 위험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세상은 요란한데 예수님은 평안하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정말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평안하다는 말씀이시다.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잠잠케 한 예수님의 기사를 보고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주목할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어떤 풍파에서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안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상실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 역시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세상이 바다의 풍랑과 같이 험악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든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보고 정상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위에 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하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을 만든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신앙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은 나무라고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책망하여 돌이키는 본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모든 일의 이유를 하나로 정리하면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약속을 했는데 한 사람은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간관념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보통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이 시간 약속을 어긴다. 그러면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시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은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이 또 못 마땅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늦을 수 있는 거지 그것까지고 뭐 그러냐? 는 식이다. 그것 역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이 어쩌다 시간에 늦으면 정말로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적어도 변명이라도 한다. 그것은 자신도 시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 생각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다 세상의 풍파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세상의 풍파가 아니라 은혜고 행운이고 축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다르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떠 있는 조각배 같은 나의 인생에게는 다 풍파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 안에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자로 성경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생각이 어떠해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알려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 성품과 의와 뜻으로 세상을 펼치고 창조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는데 다시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족한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면,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의 말까지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쁜 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는 오해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창조의 목적, 그리고 사람에게 두신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두신 통치의 일환이라고 봐야지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단편을 분리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도 만드셨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과 자신이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세상의 풍파로 여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실수나 오류나 악함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마귀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이 마귀와 싸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속된 말로 마귀와 싸울 군번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마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되고 사용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하는 그런 계급 낮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옳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다 순종할 수 있는 분이셨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가져가려 하는데 그것을 내어주는 사람보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순종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은 세상의 풍파가 잠자는 것을 깨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세상도 경영 못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말로 성난 바다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희망처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려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오거나, 천군천사들이 로마를 무찔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난 바다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길 힘은 자기 안에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내 생각과 다른 것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평안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배는 거친 풍파 속에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도 있고, 또 한편에는 제자들처럼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아 무서워 떠는 마음이 사람 안에 늘 함께 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상을 볼 때는 평안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을 때는 불안하다. 그때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세상의 풍파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법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 순종하고, 또한 이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했을 때 기이하게 여겼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그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평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자기가 해 보지 않은 것은 언제나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세상을 이기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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