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성경의 문맥을 가지고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전혀 무관한 사항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의가 결국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다음에 먼저 문둥병을,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이 두 병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생의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여 삶이 일그러진 인생을 표현한 문둥병과 또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중풍을 고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중풍과 문둥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은 병을 고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병든 것을 고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바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병든 것을 고치셨다. 병명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냥 열병이라고 나온다. 사람이 아파서 열이 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몸이 어떤 병에 저항하는 경우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몸 스스로가 열을 올려서 병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났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 안에서 없애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장모라는 것은 아내의 어머니다. 즉 딸을 낳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장모가 또 다른 자녀로 아들을 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베드로에게는 여자를 낳은 여인이다. 그것이 바로 열병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이건 육신의 여자와 아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여자이고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즉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라는 것이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는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된 것이다. 즉 남편의 생명을 낳는 것이다. 즉 남편의 유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듯 육신으로 낳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아내이고, 여기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은 남편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명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다시 그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곧 아들과 같은 생명을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는 딸을 낳은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열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이제 벗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형식과 같은 여자를 낳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병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비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사실 이와 같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떤 형식을 더 잘 지키면 신앙이 나아질까 고민하느라 열나고, 교회는 어떤 형식의 행사를 추진해야 더 나은 결과를 낳을까 열병처럼 고민하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이나 행사와 같은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 여자를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벗어 버리려 하면 이만저만 열병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은 신앙의 규례와 형식을 좇고, 교회는 더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려 하면 얼마나 힘 드는지 모른다. 그러다 그런 것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른 것을 찾으려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열병을 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 간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듯 딸을 낳은 신앙을 벗어버리려 열병이 난 베드로의 장모, 그러니까 이제 사위가 예수님을 만났듯 자신도 열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자리에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더 이상 딸이 아닌 아들, 곧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이 자기 안에 잉태되기를 원하는 신앙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시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에 그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는 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병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여 열병이 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늘 딸과 여자와 같은 형식만 추구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다, 그것을 떠나 온전한 신앙을 회복하고 싶어 열병이 난 사람이 온전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병자들이 회복되는 것은 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런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기적을 뒤로 하고 자신을 구하는 기적은 보여주지 않으신 체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셨다. 그것은 기적을 행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기적의 목적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 번의 제사로 회복하는 십자가에서는 그런 기적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낮에 태양이 뜨면 모든 전구를 다 소등하듯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사와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는 상태의 모든 인간, 그리고 중풍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지 못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그 안에 낳지 못하여 괴로운 삶,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병든 자들을 고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도 더불어서.


(알립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치유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카테고리 <치유>를 참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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