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을 고치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께 한 백부장이 왔다. 백부장은 당시 군대에 있어 실세였다. 당시 군대는 휘하에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린 수를 기준으로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이렇게 계급이 있었는데, 천부장은 실제 군사를 1,000명을 거느린 경우보다 백부장의 여럿 모아 장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백부장이 실세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백부장이 자식이나 부모도 아니고 자기 휘하에 종이 아픈데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풍을 앓고 있는 종을 대신해서. 중풍은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병이다. 사람이 생각은 멀쩡한데, 그 몸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중풍이다. 군대로 말하면 명령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인생의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흔쾌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 때, 백부장의 대답이자 요청이 대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 못하겠으니 말씀으로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하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신도 남의 휘하에 있고 또 자기 밑에도 사람이 있는데 자신이 가라하면 사람이 가고, 자신이 오라하면 사람이 온다고 말을 한 것이다. 중풍이 어떤 병이고, 그것에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고 하신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이 백부장이고, 또 하나는 수르보니게 여인 이렇게 두 사람.


지금 이 말씀, 이 상황은 중풍병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면, 오히려 그 종이 아프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풍이라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머리의 생각이 몸에 미치지 못하여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중풍이다. 군대로 치면 대장의 말이 사병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런 관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문둥병을 고치셨다. 문둥병은 사람이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함으로 자신의 몸이 일그러져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삶을 살다가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질 때 문둥병과 같이 일그러진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중풍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이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중풍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중풍이듯,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런데 실세이고 자기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는 백부장의 종이 중풍이 걸렸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는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과 중풍이라는 관계가 예수님의 말씀이면 고쳐지는 관계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의 위치로 볼 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청하는 것이다.


이 백부장의 믿음이 칭찬받을 만한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과 자신과 자신의 종, 또 중풍이라는 병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주권을 가지신 분이고, 중풍이라는 병도 예수님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분명한 주권의 실체를 알고 또 그 아는바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백부장은 자신이 처한 위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중풍이라는 병이 머리의 생각이 몸에 잘 전달되지 않는 병이듯, 자신의 종이 중풍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 안에 없고,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여 그 성품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지금 그는 표면적으로는 종의 중풍을 고치려는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고치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란 수동적인 순종의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이루어지게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와 무관하게 자신이 하나님께,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드리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좋아 하는 분이라고, 또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 백부장과 같은 마음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맺어진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 오셨다. 그러니까 말씀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보이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보이시는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몰려 온 상황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과 신앙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세상의 삶은 대충하면 되고, 교회에서는 바로 살면 된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짙어지면 세상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이 신앙에 해가 된다고 하여 따로 모여 공동체를 구성하겠다며, 전원교회나, 유병언의 공동체와 같이 독립되고 일반 사회와 단절된 공동생활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그러니까 백부장이라는 지위와 그 지위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행하시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터전이고 형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어떨 때 보면 정말로 죄악 밖에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보일 수 있는 마음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믿는다고 하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을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 세상은 잘못되었고, 타락했고, 죄악 밖에 없는데 그 안에 자신이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는 손을 쓸 수 없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은 마귀가 점령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바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들은 다 모순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혹은 일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가 마귀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통치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 사람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우리가 볼 때 죄악이 만연한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경륜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좇고, 세상을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생 같은 것이다.


죄악에 짜든 것 같은 세상은 하나님의 회복이 그려져야 할 도화지 같은 것이고, 종과 상전이라는 반인격적 사회구조지만 백부장은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듯이 모순덩이 같은 이 세상의 문제들도 순방향 혹은 역방향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기에 모든 것이 충만한 세상이다. 이것이 바로 바다 속의 물고기기 짜지 않음 같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비늘이 있는 물고기를 먹으라고 하신 이유이다. 즉 바다가 짜다고 물고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짠 바닷물을 먹고 그 안에 살지만 자신은 구분되고 그것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백부장은 바로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백부장과 같이 유력한 이가 그 시대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어 정치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고 그 시대의 죄악과 부패를 알지 못 할리 없지만 그는 그 사회의 구조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섭리가 투영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믿음이 칭찬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풍은 머리의 생각이 몸을 다스리지 못하는 병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고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는 몸인데 하나님의 의가 그 몸과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고, 산에서 내려 오셔서 군중과 죄인들의 삶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이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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