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4 문둥병을 고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7. 07: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시고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 곧 많은 사람이 좇았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실 때는 제자들이 나왔고,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좇았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신 것,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보여주시는 것이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산에서는 말씀을 풀어서 가르치셨더니 그것을 배우고 따르겠다는 제자들이 나왔고,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허다한 무리, 그러니까 제자라기 보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더라는 것이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고,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인지를 낮은 곳, 즉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그것을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좋은 양복과 가운을 입고 높은 강대상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작업복, 운동복 입고, 슬리퍼 신고 같이 살아가면서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행하려면 행함의 터전 곧 삶의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충분히 치장할 수 있는 모습, 좋은 옷에, 높은 자리에서는 길을 알려 줄 수는 있어도, 같이 걸어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시니 문둥병자가 나아와 말하기를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면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심으로 문둥병을 깨끗케 하셨다. 


문둥병은 몸의 감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감각이 없다는 것은, 몸이 어떤 자극, 또한 자신을 향한 신호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둥병이다. 그렇게 자신의 몸에 감각이 없다보니 자신의 몸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알지 못하고 그 고통을 알지 못하는 병이 문둥병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병자들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들고 아프고 다쳐서 죽게 되는데 그것을 고쳤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고 있어야 제대로 고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즉 그것은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 구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다 보니 나타난 기적이고 현상으로서 몸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고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다. 지금 예수님은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내려오셨다. 그리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보이시려 하시는데 처음 만난 것이 문둥병자라는 것이다. 몸이 감각이 없어서 외부의 자극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 몸이 썩고 있어도 알지 못하는 문둥병자를 만나신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고, 또한 몸이 썩고 형상이 일그러진 상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상태는 몸의 형상이 망가지는, 즉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지고 있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예수님을 만난 문둥병자는 먼저 절하고 병을 고쳐주실 것을 청했다. 절을 한다는 것은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문둥병이라는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예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즉 몸의 형상이 뭉그러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예수님께 주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고 방황하고 또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이 꿈꾸던 것, 자신이 의미를 찾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다 일그러진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얼마나 다그치고 노력하는지 모른다. 위대한 것을 좇고, 본질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꿈과 의미를 회복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벽돌을 굽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문둥병을 고치려면 그렇게는 안 된다. 구약 성경에서 원래는 문둥병자는 사람 다니는 곳에 함부로 다니면 안 된다. 성 밖에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지금 사람들, 그것도 허다한 무리 앞에 나온 것이다. 그것이 이미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는 다른 모습이다.


즉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은 자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그러진 자신의 형상을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시인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께서 그것을 고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그러진 자신의 꿈과 인생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회복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나가는데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이 이 육신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을 기도하고, 이 땅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회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말씀을 선포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듯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이 인생으로서의 자기 본질을 회복시키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믿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라야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절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야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이 회복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그리고 이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면서 깨끗하기를 원한다고 하심으로 이를 회복시키셨다. 즉 문둥병자와 같이 일그러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이 회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되는 것이 영적 문둥병, 문둥병으로 예표되는 우리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복된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레 14장)을 드리라고 하셨다. 이는 문둥병이라는 것이 의원에 관한 병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그랬다. 문둥병은 제사장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그에 맞는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그 예물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문둥병이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산제사를 드리는 인생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 목적이거나, 하나님의 아들은 적어도 문둥병, 그게 아니라면 감기라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인생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문둥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고, 그것이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자리에서 벗어난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우리에게 산에서 내려오시듯 내려 오셔서 육신의 손으로 만지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말씀을 행하심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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