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란 말 그대로 하면 '먼저 아는(안)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사이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연관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한 "산상수훈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는 주기도문도 있고 또 유명한 말씀들이 있는데, 이 말씀들을 한번 요약해 본다면 사람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애통하여 그것을 구하려는 자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을 때 주신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채워지면 그 삶이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이라 요약할 수 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 규범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본질이고 정체성이고, 사람의 모든 삶과 행동의 근간이다. 마치 생명의 모든 본성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그 가진 본성을 나타내는데 바람이며 홍 수 같은 비가 방해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가 홍수 난다고 개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짐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삶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노릇,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척하는 사람은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신앙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 행동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그 안에 없는데 그 모양만 흉내 내듯 노릇을 하는 자는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분명한 말씀이지만 특히나 신학적 관점에 있어 신앙이나 성경의 해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같은 것이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노릇인 것이다.


생명이란 환경이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 개가 바다에 가면 죽을 수는 있지만 물고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형편이 달라진다고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결국 선지자 노릇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여, 주여"하며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다고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이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하고, 특히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며 신앙생활 잘 해야 한다고 할 때도 많이 사용한다. 그건 적절한 사용이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선지자가 선지자 노릇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기적 중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주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 어지간하면 대통령이 누군지는 안다. 하지만 그게 대통령이 자신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아니 내가 대통령을 안다고 대통령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지기 원하셨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척, 곧 선지자 노릇하는 것에 대하여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에 비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아 그 뿌리를 찍어버린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외식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같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 만물이고, 그 생명이 표현될 때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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