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어 행하는 사람, 율법이 완성된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심령 안에 그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고, 또 행동 강령처럼 교리나 헌법이나 규칙으로 만들어 체크리스트처럼 실천해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싶을 수 있다. 또 '정말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만 있으면 성경을 다 지키며 살 수 있다는 말이냐?'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답하기를 '모든 노래 가사가 이해가 다 된다'라고.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성경도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안에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모두 자신이 그 기록한 내용을 경험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고,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말씀이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기에 사람들이 읽도록 기록하고 또한 사람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게 될 것입니다."하는 것은 예언이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 증거로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기록하고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중요한 관점이고, 믿음에 있어 절대적인 관점이다. 즉 성경을 기록하고 전한 사람들의 말을 읽고 들어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도 할 수 있다고, 아니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능치 못함이 없다니까 암 환자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성경 말씀을 능히 이루고, 행하며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다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건 바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기적을 따라했을 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있지 기적을 따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살고,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나, 주일날 자신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는 것을 평생 지키는 것이나, 평생 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평생을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건 하나님뿐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참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겠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나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밥 퍼주는 사람을 보고 칭찬은 해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티내고 교회 이름으로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일반 관념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성경대로 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욕하지 않고 살 수 없고, 음란한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 화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음 같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삶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실존을 바로 인식한 사람은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바로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연약한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알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행위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인간이라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이 나를 십자가로 끌고 가듯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는 것을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듯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율법의 목적이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의 실존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된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 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되면 온전한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 안에서 시작된다. 한 알의 씨가 땅에 심겨져지고 싹이 나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듯.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고 나면 이전에 생각했던 위대함을 좇아 하나님 가까이 가려는 모든 생각은 다 버린다. 사람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짚을 넣고 구워서 벽돌을 만들 듯 인생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았던 모습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상에 절어 있던 사람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게 되고, 운전할 때 옆에 가는 사람보다 내가 빨리 가야하는 이유가 자기 안에서 없어지기에 난폭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기적이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을 보면 십자가에 달린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품성이며, 산상수훈의 주제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사람의 존재 이유고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다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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