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5. 16:16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좁은 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역발상적 선택이나, 어떤 광고 카피처럼 남들이 다 "예"할 때 "아니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모양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이라는 것은 문을 기준으로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단순히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문은 공간적으로 보면 다른 두 공간을 분리하는 경계 중에서 두 공간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한 특정한 경계이다. 또한 문은 들어가는 것에 있어 아무나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즉 문이라는 것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열쇠라고 한다.


물론 이 말씀에는 열쇠라는 말이나 열쇠가 필요하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좁은 문을 선택하는 마음이 바로 열쇠이다. 그 열쇠가 없으면 두 세계를 넘어서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세계인 생명의 길로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남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대접하는 것은 천국의 문을 지나갈 수 있는 열쇠라는 말씀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셨다. 큰 문,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그 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단지 크다는 것 그 하나의 이유로 멸망을 당하는 길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큰 것을 선택하여 망한 사례가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이 그랬다. 그러나 가장 큰 선택은 역시 네피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아 네피림 곧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 부모의 바램이고, 그 부모의 유전자가 형상화 된 것이다. 즉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고 선택했다는 것이다. 즉 큰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 멸망했다.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 너머에 있는 세계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문이다. 즉 위대함을 좇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큰 문은 사이즈가 큰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것을 좇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좁은 문은 위대함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리로 가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말에도 군자 대로행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곳으로 가는 것의 의미란 그런 것이고, 반대로 좁은 문으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그 가난하고 멸시 받는 동네에서 사시고, 그것도 높다고 생각하셨는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인 사형수의 자리로 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이고,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항상 위대함을 좇아간다. 문이라는 것이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위대함을 좇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에 거의 유전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 위대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의 본성, 그리고 양이 지나가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 예수님을 의미하는 양은 구속자로서 예수님을 예표 한다. 즉 다른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성품이 양의 성품에 비유된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은 결국 예수님의 성품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다.


즉 큰 문이 위대함을 좇는 문이라면 예수님의 문, 양의 문, 좁은 문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고 좇아가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해지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인은 의인으로 인정받기 원하고, 부자는 부자로 인정받기 원하며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인 것은 결국 그 성공한 자리에서 베풀 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목사는 성경에 관해서 절대로 평신도에게 지려 하지 않는다. 부자는 노블리스 오브리제로서 주의 일을 감당하려 하고, 교수가 되면 그 지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 오죽하면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좁은 문은 남들이 선택하지 않아서 좁은 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위대함을 좇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기에 좁은 문이 된 것이다.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가려는 마음이 좁은 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길이 좁겠는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작고 좁아서 좁은 문이다.


문은 어떤 두 세계를 넘어가는 통로다. 그리고 문이 있다는 것은 그 문을 지나가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양의 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고, 큰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존재가 들어가는 문이다. 좁은 문은 양의 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의 문이다. 그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볼 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좁은 문이지 사람이 들어가기 좁은 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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