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하여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형제를 비판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를 심판하면 하나님이 너도 심판했으니 너도 나의 심판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형제를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근원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형제를 심판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도 언젠가 심판을 받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형제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안에 없으면서 그 형식만 지키는 것이 외식이듯, 하나님의 의가 없기에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안ㅍ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고 하셨다.


거룩하다는 것의 원어는 '코데쉬(kodesh)'라는 말인데 이것은 '구분하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한다. 즉 거룩하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신들과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신이 사람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에 축복하는 신인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로 가늠하시는 구분된 신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구분하시는 것으로 구분된 것을 말한다. 율법에서 먹지 못하는 짐승들로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이나 또 비늘이 없는 생선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다 구분됨에 관한 것이다.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신앙에 있어 가치관이 구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비늘이 있다는 것도 세상을 의미하는 바다와 구분된 것을 먹으라는 말씀이기도 하다.(먹는다는 것은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가치관이 구분되고, 신앙이 구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하나님께 공로와 십일조와 같이 소유를 드리면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축복을 받아 풍족하게 살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과는 확연히 구분된 신앙을 가질 때 비로소 구분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구분된 것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이유도 사실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소유와 공로를 드리면 축복을 받는 다는 것과 같은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전통적인 타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늘 책망을 받는 것이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구분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늘 책망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다른 이방인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구분되지 않고,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관습과 행위, 그리고 십일조를 드림과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위로 할 것 같으면 피로 구분되는 민족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고 민족이라는 것은 혈통으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종족이 아니라 생명으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존재인가를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이지, 어떤 규례를 지키고 있느냐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블로그에서 정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세상에서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지금의 교회가 타락했다고 한다면 이유는 오직 그것이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행함으로 봉사하고 신앙적 행위를 하자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그것을 좇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봉사든 그 어떤 신앙적 행위는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이지, 그것을 행동으로 따라 한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또한 인고의 결실과 같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구분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체 행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다른 신과 구분이 되지 않게 섬기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의가 그 안에 없다는 점에서 외식하는 것이나 같으므로 또한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만약에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면 개나 돼지나 우리를 해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과 연관해서도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신앙적인 비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면 거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는 말이 있다. 남을 비판하는 것 특히나 신앙에 대하여 남을 심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 같은 일이다. 마치 전투를 이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다른 것이다. 즉 이방신과 구분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옳은 것을 가지고 잘못하고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갈 때 끌려가시는 의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고 구분된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 온전한 것을 알면 알수록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살펴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이는 참 거룩한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면 너희를 오히려 헤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임에도 온전치 않은 자들이 온전하다 또 의롭다고 주장하는 심판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더라는 것이다. 또한 그랬더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분된 것이고, 이것이 거룩함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채색하는 것과 또한 신앙이란 이름을 형제를 심판하고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안에 없는 외식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