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 비판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2. 10:30 Writer : 김홍덕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일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보편적 도덕 기준의 명언과 같은 말씀이다. 이 말씀에 나오는 비판은 영어 단어로 보면 심판이라는 의미가 대표적 의미인 judge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주기도문 전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의 과실,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과 또 은밀한 중에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말씀과 같은 법칙을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히 다시 보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심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심판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심판자와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발달된 상황이라면 변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특히나 심판하는 사람과 심판 받는 사람은 분명한 법을 기반으로 상하 관계가 성립된다. 심판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심판하는 법에 관해서 심판 받는 사람보다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법에 있어 더 높은 사람이어야 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뒤 이어 눈에 티끌과 들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심판하는 것으로 다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생각해 보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법을 가지고 도적질 하는 사람을 심판하면 언젠가 그것을 심판한 사람도 절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 같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더 싶은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신 것이 그것이다. 눈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몸의 등불이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는 가치관이다. 그 가치관에 티끌 같은 문제가 있다고 심판한다는 것은 눈에 들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티끌과 들보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특히 들보라는 것은 건축물로 본다면 근간에 해당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은 가치관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눈 안에 있는 들보는 가치관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의 잘못을 보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 의의 근간이 무너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외식한다는 것은 거듭 말하고 있듯이 내용이 없이 형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는 없이 형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자는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으므로 먼저 하나님의 의를 채우고 나서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들먹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남의 잘못을 비판하면 나도 언젠가는 동일한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일차적인 해석에 머물 것이 아니다. 어떤 내용이라도 남의 허물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외식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심판이 이루어지려면 법이 있고, 심판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어떤 법에 대하여 더 밝은 사람, 더 깨끗한 사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있어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한다는 것은 자신이 더 의로운 사람이라는 교만한 마음 없이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어떤 것에 대하여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형성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외식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법에 대하여 가장 밝은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특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떤 것이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자리에 계시다는 분이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도 아주 명확하고 확실한 심판을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판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심판하는 그런 심판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스스로 심판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판의 들보, 심판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보가 없는 눈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고치려 한다. 특히 지적하고 심판하고 또 나름 충고를 한답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왜 그런 잘못을 하는지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주제가 신앙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그런 모습이 너무 많다.


한 교회에 말씀에 아주 밝은 목사님이 계셨는데, 교인들의 신앙이 좀 잘못되었다 싶으면 그 사람 없는 자리에서 그것을 은근히 말하면서 늘 여론을 조성하여 결국은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훈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한 권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왜 그렇게 뒤에서 자꾸 이야기 하시느냐?' 물었더니 '앞에서 말하면 그 사람이 죽습니다.'라고 답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사람 죽이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복음인가요?"라고 그리고 "사람을 교훈하는 방법이 말 뿐인가요?'라"고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비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판 대신에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 그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른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시고 같이 살아내시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며 다 도망가고 십자가 밑에는 겨우 요한 사도 한 명만 남고 떠나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이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했고,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남을 일을 책망하지 않으셨더니 스스로 그 눈의 가치관을 다 바꾸어 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잘못한다고 심판하고 비판하고 뒤에서 분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돌이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또 자신들도 그 분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어떤 심판,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이신 것임을 함께 알고 이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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