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 생존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입는 것은 절대적인 것들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이것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신앙하는 신에게 이것을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종교의 신앙 안에서 이러한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얻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 비칠 만큼 간절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신앙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에 욕심을 버린 청렴하고 수도사적인 삶이 좋은 신앙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어떤 종교에도 그런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다 있는 것 같다.


기독교도 오랜 역사 속에서 수도사라는 말로 대변되는 금욕적이고 청렴한 신앙이 늘 있었다. 지금도 신앙이라는 것이 재물과 독립된 것이라는 바탕에서 교회의 재산의 경우 교회가 재산을 가진 것이 아니라, 노회와 총회의 재산으로 등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소유와 신앙은 분명히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특히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재물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의 의미를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며 또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지에 대한 바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신앙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첫째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에 대한 차이고, 두 번째는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차이이다. 그 차이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갈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려하고, 하나님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차이가 사람의 정체성과 사람이 속한 세상, 그 두 가지에서 늘 마찰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과 이 세상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절대적인 갈등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지 않고 진화되고 우주 빅뱅이론이 인간 실존 문제의 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해당되지 않는 문제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사람 안에 채워야 할 것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외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의 일부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성경은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 생명이 가진 본성이 표현되듯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사람의 행동을 절제하고 통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행동, 곧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의 목숨(생명이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본질이라 여긴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하는 거룩한 곳인데, 그곳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과 같이 육신이라는 형식에 필요한 재화와 때로 용역 그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양은 성전으로 비유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소유와 공로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 놓인 것과 같은 것이다. 성전에 이방 신상을 놓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다른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것은 같은 것임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나는 새도, 들에 핀 백합화도 다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입히시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지 반문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존재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육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시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그런 것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 그런 것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런 것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 요소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소유를 바라고 공로를 드리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정체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는 것에 대한 바른 생각은 그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에 필요한 만큼은 염려하지 않아도 다 주시니,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 본질임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보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 역시 그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그것이 영광을 얻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나라와 의가 표현되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시기에 자신은 그것에 순종만 하면 그 필요한 것을 다 주실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단 두 가지 경우뿐이다. 먼저는 인생의 본질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육신이라는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경우다. 그것은 마귀가 시험한 예수님의 시험 중에 세 번째 시험에 완패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 신앙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신앙은 이방인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현하는 것에 있어 어떤 먹을 것, 어떤 마실 것, 어떤 입을 것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표현되는데 소요되는 물품에 대한 예산을 하나님께서 계산도 못하실 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것은 천부께서 이미 다 아신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나 이 순종이 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주 위험하고 아찔한 것이다. 더 좋은 교회건물, 더 좋은 수련원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도 그런 생각 때문이다. 교회가 몇 년 앞당겨졌다고 말한다면 이미 그 생각에 중독된 것이다. 교회나 신앙의 여정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다. 좋은 예배, 좋은 성전이나 수련원 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믿고 우선 자기가 가진 육신 능력과 교회의 역량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교회가 신앙적 오류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목회자나 교회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교회를 하나님보다 더 앞에서 이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교만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과 마찬가지고 그런 것을 이미 세상에 다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것을 나누는 문명을 발달시켜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 역사까지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시점의 세상에서 정해진 방법으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말로 세상에 있는 법에 따라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 문화나 사람의 모든 생각에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행여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을 구하기 힘들다면 그 때 기도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그런 구제를 위하여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즉 구제는 그런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구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고, 그 삶 안에서 사회적으로도 열심히 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어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기력조차 없는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나라와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난을 구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절대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필요한 것을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님은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이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고, 또 이 육신과 세상을 주신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육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세상의 법에 따라 구하여 충족시키는 것도 알고, 더 나아가서 그런 모든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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