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9-34 눈은 몸의 등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9. 17:0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의 보편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복음이어야 한다. 맹인이든, 병든 자든, 또 죄인이든 창녀든 그 누구라도 그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특히 교회나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신앙 좋은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더 좋은 신앙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신앙이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좋은 신앙을 주셨으면 주셨지, 그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신앙이라는 조건으로 대접 받는 것을 위하여 주신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복된 소식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저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 좋은 사람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더 좋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에 불 일 듯 소망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지 신앙이 좋다고 신앙 없는 사람을 심판하면 그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간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생각이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볼 것이라 생각이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이 육신의 눈이라면 맹인은 예수 믿을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그렇다는 것은 이것은 육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렇다는 것은 복음은 사람의 형편이 어떠하더라도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흔히들 사람이 가진 눈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육안이고, 두 번째는 식안(識眼)이고 다음으로는 혜안(慧眼)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안목을 목안(目眼)이라고 한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 그리고 지혜로운 안목, 그리고 그 모든 것 보다 더 나은 안목은 목적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가치관이다. 즉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떤 안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은 목적을 아는 안목과 가치관은 몸에게 등불을 비취듯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몸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며, 그 가치관과 안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경을 흐르는 기본적인 흐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안목과 가치관이 사람의 삶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몸을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를 바로 알고 있는 안목이 있어야 몸이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육신과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끌 때에 안목이 온전한 것이며, 그럴 때에 삶이 상하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어진 말씀과 같이 몸은 하나이기에 하나의 안목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목적은, 존재의 목적은 당연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몸이 어디로 가는지와 주인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몸을 가진 인생이 두 가지 가치관을 좇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친관은 결국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한다면 신앙의 타락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보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영지주의가 또한 그것에 뿌리를 두고 타협한 것이다. 타협이라는 것이 결국 신앙에 있어 두 가지를 함께 섬기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앞에서는 보물에 대하여 그리고 이 말씀 다음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런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육신에 관한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물을 땅에 두지 말라고 하시고, 의가 육신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아는 눈, 곧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사람이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 땅에서 오는 것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생각해보면 오묘한 말씀이다. 하나로 흐르는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본질로 여기고, 인생이 어디를 보아야 하고,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구조, 그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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