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이어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씀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이 좀 궁금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데, 가르치신 배경에는 외식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이어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러므로'라고 했다는 것은 앞에 어떤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식에 관한 것이었다. 즉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고 기도를 가르쳐줄테니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 뒤에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이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고 말씀을 하신다. 즉 기도라는 것과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일원론적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좀 다르게 표현하면 존재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비유하자면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이원론적 관점이라면, 일원론적 관점은 누가 술을 마셨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행위냐 존재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인들은 일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전의 앞뒷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 자체의 가치관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과 매우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관점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냐 하는 것이다.


존재와 행위는 단계적인 것이다. 모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어떤 행위든 존재가 먼저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 존재의 본성이나 특성에 맞는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존재의 신이시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것에 관심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위를 먼저 본다. 물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행위를 보고 존재를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행위를 표현한 다른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시인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신앙인들이 행위를 바로하면 존재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성경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런 관점으로 깔끔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이 어렵고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은 성경의 탓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점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존재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존재, 즉 생명이 표현하는 행동을 말씀하고 있는데, 반대로 행동을 하면 존재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으로 보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이야기하듯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은 군복을 벗어도 군인으로서의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고, 또 어떤 임무에 따라서는 군복을 벗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우선 몇 가지 군인 흉내는 내겠지만 이것저것 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들통이 나는 것이다. 그것처럼 성경을 존재의 본성에 대한 말씀으로 보지 않고, 행위 규범으로 봐서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으로는 성경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외식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외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내용 없는 형식, 존재가 먼저 정의되지 않은 행위, 그것이 바로 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에 있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로서 먼저 존재가 정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식하지 않는 사람, 곧 내용이자 생명인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주기도문에 이어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다른 내용이 아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너희 안에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하라> 그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풀어서, 또 어떻게 보면 압축해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나타남이 바로 행함인 것이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과,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4절에 말씀하신 잘못은 영어 성경에서는 sin against you(NIV), trespasses(KJV)로 나온다. 즉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를 넘어서 나의 경계너머로 들어와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용납하라는 것이다. 그 용서의 첫 열매가 바로 십자가이다. 즉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용서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침범한 죄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담보로, 혹은 기대하거나 계약 조건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야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같은 생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생명으로 인한 본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서 비롯된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 그 생명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에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입증하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것이 기적이고, 그 생명이 있어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이기에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어서 살리시다보니 부활인 것이다. 


부활이라는 놀랍고 정말로 모든 신과 구분되는 그 기적도 하나님이 사람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 보여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께는 일도 아닌 것이다. 만들기도 한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생명, 남의 죄를 용서하는 생명은 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어야 살았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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