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6-18 금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8. 16:47 Writer : 김홍덕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금식이라는 것은 대 속죄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규례가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금식이라는 것을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금식기도로 보통 통용된다. 어쨌든 금식은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신앙에 대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금식을 해라 하지마라는 말씀은 하셨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금식할 때 슬프고 힘든 표정을 짓지 말고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하게 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제도 그렇고 금식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하지 않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선행을 베풀고 또 종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은밀함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은밀함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이 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은 금식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은 사람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은밀한 것은 숨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일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것과 다르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이야기 한다면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영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성경을 문자로 읽고 행동 규범으로 보면 금식할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게 된다.


금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일에 대한 표현이다. 금식이라는 것은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속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속을 비운다는 것은 다 목적이 있다. 내시경 검사를 위하여 전날 밤부터 금식하는 것은 위장의 상태를 잘 보기 위한 것이고, 음식으로 인하여 탈이 났을 때는 위장을 쉬도록 금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금식하는 경우에는 투쟁이 목적이기에 그것을 단식투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은 굶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속을 비우기는 비우되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비워낸다는 것은 지금 들어 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있는 것을 비워내고 채워야 할 것을 채우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식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라는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 곧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심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의 성품을 사람 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담겨 있는 상태일 때 그것을 비워내고 원래 사람에게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말씀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것을 비워내는 것, 그것이 금식인 것이다. 그래서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는 것이다. 금식과 속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기도라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이다. 기도는 곧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채운다는 것, 즉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과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은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 두시기 원치 않은 것을 밖으로 다 내어버리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두시기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온전한 금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을 했다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되는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을 자랑하고 다녔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보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도 금식을 했다는 것은 어떤 신앙의 훈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부흥강사들이 간증한답시고 자기가 금식한 것을 교묘히 끼워서 이야기 하는 것도 그것이거니와, 금식한 사람 못지않게 금식한 사람을 보면서 신앙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비워내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채워야 할 것은 어떤 것인가? 채워야 할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아닌가? 그것은 성경책이 변해서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님 말씀의 의와 같기 때문에 그 의와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 아닌 것을 비워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인 하나님의 의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도발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 교회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또 천국 가서 잘 살기 위한 것이다.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구원도 거의 그것의 자격 요건으로 보일 정도이다.


기독교 신앙이 타락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증명할 증거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라는 말을 전하고 그것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게 알고 보면 면죄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생각,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 받는 것에 두는 생각, 또 고상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비워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오직 십자가로 인하여야 하지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보고 교회로 온다면 그건 오는 사람이나 본이 되는 사람이나 다 돈이 하나님인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문 돈은 고사하고 옷 한 벌도 없었는데도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은밀하게 싹이 되어 금식한 마음에 채워져야 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을 잘 갖추었다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금식으로 비워내어야 할 것들이다.


금식은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담으려고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비워내는 것이다. 바로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금식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거나 기쁨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듯 하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뭔가 부끄러워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은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금식이 사람의 심령 안에 있어서 안 될 것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의를 채우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인 일이기에 은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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