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다 아는 말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어도, 도덕적으로나 사회 윤리에 있어 아주 도움이 될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윤리적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구제하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살인이나 간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육신에 관한 살인과 간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경제적인 형편을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 더 엄밀히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실 때 필요하다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사람이 곧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성경에서는 의에 관하여 하나님께 반하면 민족을 쓸어버리기도 하시는데, 그깟 경제적 상황이 하나님께 중요한 관점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제함도 하나님의 의와 연관된 말씀인 것이다.
그 의를 나눔, 의가 간절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눔에 있어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에 나눔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나누는 것으로 구제가 표현되고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육신의 삶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구제하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왜냐하면 재화와 용역에 관한 구제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육신에 관하여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 안에 있으면 결국 육신의 삶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기준 조차 지켜내는 , 아니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하라(마 6: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나타내거나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갚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의를 숨기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의를 행하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듯이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는 드러내려 한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주 은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은밀한 것은 성령이 보이지 않으심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보고 자신도 감동을 받아 그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가는 과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아니 영혼 깊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의를 전해지는 과정에서 육신의 눈과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보았기에 그것이 심령 안에서 싹이 나는 것이고, 들었기에 싹이 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은밀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은밀함이 어떻게 왼손이 알도록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하면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육신으로 여유가 있어 구제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은밀히 하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왜냐하면 돈 잃고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구제는 의를 구제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이를 위하여 구제하고 수고하는 것은 의를 구제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구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고 하니 은밀하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밀하게 구제하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하니 신문에 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성경은 외식이라고 한다. 즉 내용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생명이 된 사람이 은밀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감동으로 생명이 전하는 의의 구제라는 내용 때문에 나타나는 구제가 아닌 구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왼손이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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