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7-12 구하라 주실 것이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08:01 Writer : 김홍덕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마 7:7)


이 말씀은 기도의 기초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 밖에서도 어떤 꿈과 희망에 대한 노력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라도 다 구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냥 아무거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에 맞는 것을 구해야 주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전지전능하시니 뭐든지 구하기만 하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그것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다 주실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신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벗어나서 이 말씀들을 맘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특히 말씀 중에 목적어가 없다고 자기 맘대로 아무 것이나 넣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경계하라고 하시는 외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외식이라는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 하나님 의는 심령 안에 없으면서 의에서 비롯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악한 사람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말씀을 이어서 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가 볼 때 좋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뭐가 달라고 할 때, 그것이 아버지가 볼 때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위험하고 아들을 악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도 아들에게 그것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사람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구한다고 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의는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 곧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모든 인간이 구해야할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으로 사람에게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먼저 육신에 관한 것을 구하는 삶의 포인터가 육신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생의 숙제요 의미요 목적인양 살아가기 때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니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6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시리라고 하는 말씀을 어떤 이들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기 위한 전초과정이나 조건이나 열쇠쯤으로 생각한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의 착한 나무꾼이 아니라 금도끼 은도끼를 목적으로 신령에게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게 통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있으면, 아니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안에 있으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생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또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시기 위함이라면 한 민족을 멸하는 것, 아니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는 것이라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육신의 필요를 주시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고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엄청난 거부였고, 다윗왕도 그랬으며, 솔로몬은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또 신비한 능력을 행하며, 또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 같이 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순종을 감당한 사람이었기에 그것에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이다. 즉 먼저 하나님의 의와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의 목적이 먼저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한 체 그 결과인 육신의 필요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무처럼 생각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으로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순종하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를 청하고, 그 목적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제사보다 나은 순종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기에 무엇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피조물이 스스로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좋은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아버지가 더 잘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아무거나, 육신의 필요에 간절함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이 육신은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하신 오직 하나의 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수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그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필요는 다 들어 주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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