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7-12 황금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11:34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7장 12절은 황금률이라 불린다. 이는 성경뿐 아니라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윤리적 양식으로서 이 말씀을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위의 근본 성품이 있으면 된다는 것을 늘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것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대접한다는 것은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대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존재로서 대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존재로 대하느냐만 정해지면 대접 받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고, 바른 대접을 하게 되어 있다. 상대를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을 내가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내가 남을 어떤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결국 나도 그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포츠에서도 체급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대를 나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나도 그와 같은 체급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좀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답 했을 대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하셨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했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에 따른 대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접이라는 것은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인정하느냐에 종속된 것이지, 대접하는 것 그 하나가 독립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사람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로 보면,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또한 그러한 목적 아래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에 맞게 대접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가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므로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고 또한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네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다른 사람도 그런 존재로 대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대접은 그에 종속된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시고 가지셨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사람을 부끄럽고 감출 것이 많은 연약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타락한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는지에 대한 기준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명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남을 어떻게 보고 또한 그 보는 관점에 따라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에 이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하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자 내용을 구하라는 말씀이고,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휘발유은 휘발유로 동력을 발생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졌기에 휘발유가 가장 좋은 것이듯,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생명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인생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는 것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그러한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을 그런 존재로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바로 구한 것을 주신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남을 그렇게 대접한 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다보니 사바나에 떠났던 코끼리가 돌아온다는 것은 곧 우기가 올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우기가 온다는 것과 코끼리가 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기가 오기 때문에 코끼리가 온 것이기도 하고, 또한 코끼리 안에 있는 본성이 우기가 오는 것을 알아서 회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와 같다. 남을 어떻게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어떤 대접을 받을 사람인지가 정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관점이 있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또한 여러 철학적 관점들도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사람을 보는 관점이 있다. 그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보시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사람을 보는 관점 그것뿐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기대하시고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에 진노하시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연약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심에 격분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책망하셨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권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것이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서 보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며, 그런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남을 대접하는 대로 대접을 받는, 더 정확히는 그런 존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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