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29 거짓 선지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6. 12:2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은 일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크로노스의 시작으로 볼 때 2,000년도 넘은 옛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뭔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저곳에서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물론 이 블로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을 종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 자신 안에 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 곧 말씀을 마시는 자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스스로가 속에서부터 말씀이 나오고 믿음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될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결국은 사람은 자신이 인정할 때 그것이 진리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아무리 보도를 해도 사람들은 다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 지금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인터넷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생중계를 해도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기 싫은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고, 또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겠지만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 생수가 흘러넘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통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람은 우주 아니 인공위성에서 내려만 봐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지만 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온 우주를 그 안에 넣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 사람이다. 사람 안에는 어떤 것이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표현되며 사는 존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아주 놀라운 것이다. 비행기만 타고 올라가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 안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고, 자기가 만난 사람과 지나온 세월의 모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이것은 저장 용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함과 더불어 사람이라는 존재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그릇이다. 그릇이라고 하니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는 음식 같은 것을 담는 것으로 유추하지만 실상은 크기나 위대함이나 형태에 관계없이 어떤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존재이다. 온 우주라도 담을 수 있다. 사람 속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아주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여럿 있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사람이 질 그릇 같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고, 예수님은 사람이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상수훈의 많은 말씀이 연관되어 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접어들어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언급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거짓을 총칭하면 안과 밖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거짓이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속에 거짓말하는 것이 들어 있으니 그 입과 몸이 거짓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수식하신 말씀들을 보면 가장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외식>이다. 속에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데 행위만 율법을 지키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ㅈ키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한다고 심판하고 정죄한 율법의 모든 관습과 행위가 본질적인 생명과 의는 없이 노릇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말씀하실 때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속에 이리가 있다면 옷이 아무리 양이라도 결국은 이리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온 우주를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의 본성이고 능력이다. 즉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결국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가진 유전자는 결국 그것에 의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 나쁜 나무를 말씀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금하게 할 수 없고, 사람 안에 이리와 같은 것이 있으면 노릇은 할 수 있어도 그 또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리라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양을 노략질하는 것은 이리라서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겉과 속이 다른 거짓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리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으면 그건 구분이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나무가 그 생명에 맞는 열매를 내듯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다른 것이 거짓 선지자가 아니다. 자기 안에 가르치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식으로나 또한 행위에 대한 정의와 방법만으로 가르치면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누가 목사를 선지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자천타천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만약 이 말씀의 본질, 곧 의와 생명 없이 신학적 관점, 그리고 성경에 대한 객관적 고증에 대한 지식, 히브리어, 헬라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신앙생활의 방법론 밖에 없다면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생명은 생명 그대로 전해진다. 사과 씨는 다시 사과나무가 된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데 어떤 과학이나 객관적 고증이나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 것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니까 과학이나 객관적 학문이나 방법은 본질에서 비롯되고 종속된 것인데, 오히려 그 형식으로 본질을 유도하려는 것은 땅의 것으로 하늘을 바꾸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에게 그 씨를 옮겨 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고 사실 그것뿐이다. 그러면 천부께서 다 기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사람 안에서 싹이 나고 다시 그 열매를 내는데 신학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말씀에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그냥 그 생명이 열매를 내는 것이다.


이라가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것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은 생명은 없이 종교적인 형식만 양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식이고, 그것이 거짓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정직하기라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생명이 싹트는 것이다. 그것이 고백이고 그것이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 선지자는 노략질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 노략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이다. 인생을 노략질 한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이라는 것이 바로 도적질 당한 것이고, 노략 당한 것이다. 이 인생이란 원래 그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 그 생명으로 비롯된 것을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데, 내용은 없고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외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야 말로 이리가 노리는 최대의 노략질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그 안에 담도록 지어졌다 하신다. 그것만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은 온전해진다. 있어야 할 내용이 있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형식이 있으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을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신앙생활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생명체가 그 유전자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있으면 수고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적 규례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 해도 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살게 된다.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용과 형식이 같은 것이고, 그것이 외식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양이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이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발견해야할 우리의 정체성이고 신앙의 본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