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에워쌀 지경이 되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실 정도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한명은 서기관이고 또 한명은 제자. 예전에는 이렇듯 누가 예수님께 묻는지는 주목하지 않고, 거저 예수님의 대답만 가지고 누구에게는 따라 오라하고, 누구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는지 몰라 의문스럽기만 했다.


지금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나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이라고 말씀하셨다. 뒤에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문맥으로 볼 때 '오지마라'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 오겠다는데 왜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으며, 거처가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


먼저는 이 질문을 한 사람이 서기관이라는 것이다. 서기관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늘 외식하는 자의 대명사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말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외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고 머무를 곳이 없다고 답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에 관하여 답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분이 서기관이라는 것 그것 하나로 이 사람을 판단하셨는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 호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성이다. 뒤에 나오는 제자는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른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것,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보다는 그 표현된 형식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머리는 몸이 있어야 한다. 즉 머리의 생각이 표현될 몸이 바로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풍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몸은 머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중풍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고치시는 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인생으로 표현되기 하시는 본을 보이시는 분이심을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서기관의 마음, 서기관의 안목과 같은 삶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그 날의 서기관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중심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노라 외쳐도, 그곳에는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신앙에는 머리의 생각과 같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각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능동적이고 필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같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 안에 있으면 DNA가 그 생명을 표현하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룟유다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선생이기는 했지만 주님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몸의 머리 같이, 생명의 유전자와 같이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서기관도.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오히려 부정적인 답을 하고,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또 아버지의 장례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의아한 말씀을 하신다.


특히나 이것이 우리에게 의문스러운 것은 부친의 장례 치르는 것 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아주 걸리는 말씀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자를 말한다.


물론 제자의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다만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 장례를 치르게 두라고 하신 것은 그 장례를 지를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니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보고 그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를 장사지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고 다시 나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은 죽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해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좋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사회나 또한 자신이 속한 환경이 어떤 것을 요구해도 그것에 맞추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도 그냥 끌려 가셨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누구 길래, 이보다 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세상이나 삶이 요구하는 것을 뿌리치거나 거부하면서 예수를 믿으려 하는 이유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신앙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킬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기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내가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는 내 마음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다. 세상이 나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잡혀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죽어야할 것, 곧 내 마음에 옳다고 생각하는 의를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생명 같은 것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듯 장사지내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