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29-34 군대 귀신 들린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3. 13:0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셨다. 여기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는데, 이 기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 귀신 들린 자는 마태복음에는 두 명으로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몇 명인지 언급이 없고 그냥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기적을 보이셨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중풍과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풍이 머리에 생각은 바로 있지만 몸이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머리에 생각이 빼앗겨서 몸이 원래의 목적과 본성이 아닌 행동을 보이는 것이 귀신 들린 사람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귀신 들린 자를 사람들이 사슬로 묶어 두었는데도 스스로 끊고 돌아 다녔다고 했다.


먼저 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무덤 사이에 거하고 매우 사납고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이야기 할 때 사람이 자기 거하는 곳이 자기 정체성을 설명한다고 했는데,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율법의 상징인 장소인 광야에 머물렀듯, 귀신 들린 자는 무덤 사이, 곧 죽음과 죽은 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다른 존재에게 빼앗기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귀신이라는 것이 영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머리에 그러니까 의와 목적을 귀신에게 빼앗긴 것이듯, 사람이 본연의 존재 목적이 아닌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이 몸과 삶을 주장하는 것도 다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 의와 목적이 다른 것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귀신 들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재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귀신 들린 자가 사슬을 끊을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졌듯, 돈으로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 앞으로는 사람들이 잘 지나가지 않는다. 귀신 들린 자에게 사슬을 끊는 힘이 있듯, 돈에게 머리를 빼앗긴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굴레를 사슬처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그것을 끊을 힘이 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 그리고 그것이 죽은 것인 줄 모르고 특권이고 성공인줄로 알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이나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나 같은 것이다. 그게 돈이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나 도덕이면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추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문둥병이나 귀신 들린 사람이나 중풍이 열병이나 감기와 같은 것 보다 흔한 병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병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이런 병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잘못된 것을 설명하는 증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병이고, 중풍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며, 귀신 들린 것은 의도 없이 오히려 삶을 다른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 들린 자 하나를 고치시려고 거라사 지방에 가셨는지도 모른다.(마가복음 기준으로) 


사람이 가져야할 온전한 정신이 아닌 다른 것이 그 머리를 지배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하거나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머리의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이 채워져 있으면 그것은 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원래 사람의 머리, 그 생각과 정신은 그리스도가 주인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라는 정체성과 생명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머리와 정신, 곧 무엇인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를 돈이나 명예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은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며, 그런 삶은 육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하며, 그런 모습 때문에 사람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귀신 들린 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도 뭔가에 미친 사람을 위대하다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친하게 지내려 하지는 않는다. 그건 다 귀신 들린 사람 같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서로 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서로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머리에 온전히 있으면 사람이 피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모습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배 밖에서 일어나는 풍랑에 두려워하고 죽을 것처럼 여기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까 배 밖의 것의 위협이 되지 않고 평안한데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고 무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누가 무서워하겠는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으면 다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은 삶이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삶이다.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괴롭다.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거짓된 것이라는 것임이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상관이 없으니 괴롭게 말아 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닌 귀신, 돈, 명예와 같은 것이 삶을 주관하여 무덤 사이에 사는 인생들은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함(구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쫓아내시려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돼지는 구분이 없는 동물이다.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구분 곧 거룩함이 없는 존재이고, 먹는 것 또한 구분 없이 먹고 되새김질도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돼지의 본성이나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들이는 바다는 같은 것이다. 즉 돼지의 본성이 거하는 자리가 바로 바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방금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셨다. 그 바다를 건너실 때에 바다는 광풍이 일어났었다. 바로 그 바다로 지금 귀신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거룩하지 않는 돼지의 몸을 빌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바다가 어디인가? 세상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물, 곧 사람이 삶의 의미에 목말라서 마시고 또 그것이 아니라 배설한 모든 물이 다 모인 곳이 바다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가진 존재의 갈증을 해갈하도 남을 것 같이 많은 물이 모였지만 정작 마실 수 없는 것이 바닷물이고, 세상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풍 앞에 그리스도의 평안과 믿음이 없으면 불안한 것이 인생이다. 그 인생이나 돼지 속에 들어가서 바다로 들어간 귀신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에 있지 않고 머리를 세상의 온갖 향락과 돈과 명예와 과학과 철학에 빼앗긴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이 바다고, 그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람을 두렵게 하듯이 귀신 들린 자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치셨다. 또한 귀신들이 들어간 바다에 풍랑이 일어도 배 안에서 편안히 주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머리를 귀신이나 바다와 같은 세상의 것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며,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달리 사람이 그 앞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생은 귀신 들린 것이 들어가 있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항해하는 작은 배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바다가 어떤 모양이든 무관하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우린 인생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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