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자신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뜻을 배우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는 호세아에 나오는 말씀으로 원문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에 대하여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행실로 본다면 세리나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신앙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했다고 모든 것이 엉망인 사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성경을 인용해서 성경을 다시 배워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빈민촌에 사는 사람이 억만장자에게 경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조문은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데 그것보다 긍휼(인애)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제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위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어낸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 하는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이라 규정하는 가치관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고 더 나아가서 본능조차 억제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사의 규례가 정결하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결함 역시 율법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정결함이라는 의가 있다. 그리고 그 정결함이라는 것이 바로 인애라는 것이다. 즉 제사가 본질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으로 보면 문자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야 하듯이 제사라는 것도 행간과 같이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긍휼과 인애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긍휼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 지금 보여주고 계시는 것과 같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이 죄인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온 사람들이다. 즉 세상의 가치기준, 바리새인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공론화되는 것을 감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범죄하고 숨은 아담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어떤 교회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못살게 굴고 버리기도 하는데, 그건 이단 중에 이단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보자.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그 예수님을 지금 죽이려고 한다. 아직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을 뽑아서 항거했다. 그리고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모르겠고, 또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교회도 그렇게 노력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리려고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애와 긍휼을 모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다.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교인들을 비난하고, 사회적 요구에 불응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핍박이라면 저항한다.


그것은 마태의 집에 온 죄인들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즉 사회가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교회를, 또 예수님을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항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와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여 죽으신 것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태의 집에 죄인과 함께한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지금이라고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모습으로 믿는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기준으로 심판 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태의 집에 모인 죄인들은 그렇게 모이면 죄인이라 흉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날이 아니어도 늘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인데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지금 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 앞에, 바리새인들의 기준과 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인하고 무릅쓰고서 모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제사를 긍휼함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 번제를 그리고 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들이 볼 때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립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계속된 것이고, 지금도 늘 우리 곁에 있는 대립과 갈등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여서 그 삶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음을 무릅쓰고 모인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제사의 의미가 완성되고, 바리새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율법이 완성된 온전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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