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4-17 금식과 혼인잔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8. 16: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하여 질문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혼인잔치를 들어 답을 하신다.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는 동안에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하시고,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하라고 하시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연결점을 찾기 어려운 답변이 아닌가 싶다. 금식과 혼인잔치 그리고 신랑이라.


결혼이라는 것을 건조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종족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다. 그런 결혼을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것은 사람이 또 다시 사람을 낳아서 기르고 가정을 만드는 본능이 문화가 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 역시 일생일대의 기쁜 일이고, 또한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것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결혼이라는 것이 새로운 생명, 곧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어머니가 된 여인에게서 그 부모의 본성이 다시 부모와 같이 육신을 가진 생명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에게 아버지의 정체성, 가족이름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곧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나타났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혼인잔치의 궁극의 목적은 이제 결혼을 통하여 아버지가 될 신랑의 의를 표현할 아들을 얻게 되는 세계가 열리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혼인잔치는 아들, 곧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고 새 생명의 본질과 의를 가진 신랑이 있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 금식과 같이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비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혼인잔치 자리이다.


성경에서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결혼을 하려하고 또 하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법을 체휼하게 하시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는 바울 사도와 같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고, 반면에 그런 하나님의 의도 모르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금식이라는 것은 앞에서 포스트한 것과 같이 단순히 굶는 것이 금식이 아니라, 뭔가를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채워야 할 것이 채워져 있다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혼인잔치가 는 혼인잔치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신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즉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는 금식할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리고 신앙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의 삶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금식해야 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놓고 보면 하나의 개체이다. 하지만 그 한 사람 안에는 모든 우주를 넣을 수도 있고, 풍랑 이는 바다 위의 배에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과 믿음 없이 떨고 있는 제자들이 함께 있듯 사람 마음 안에 그런 두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혼인을 통하여 새 생명이 탄생하듯, 그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탄생하게 되고 그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전혀 다른 생명,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의 세계 안에 탄생하신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게 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혼인 잔치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의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곧 생명을 얻을 수 있듯, 한 사람 안에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 사람은 있을 것이 있으므로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게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 심령 안에 잉태되고 거듭나서 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혼인 잔치의 신랑과 같은 예수님이 자기 심령 안에 있으면 금식할 것이 없고, 반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없으면 삶의 목적, 존재의 목적이 없으므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식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혼인 잔치의 신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목적은 없이 율법의 형식만 신랑 없는 요란한 혼인 잔치처럼 금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외식한다는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의 욕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여서 함께 먹고 있는 죄인이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 사람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 물론 때로는 그 하나님의 목적을 더 깊이 알기 위하여 금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금식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 금식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는 모른 체 바리새인처럼 금식을 하면 좋은 신앙이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나, 신앙의 이방인처럼 육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을 달라고 떼쓰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은 하지 않음만 못한 것이다. 그것은 신랑 없는 혼인 잔치 같기 때문이다. 그건 시끄럽기 밖에 더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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