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을 때에 한 직원의 종이 와서 주인의 딸이 지금 당장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하여 예수님께서는 요청하신 곳으로 가서 고쳐 주시기로 하신다. 그 직원은 마가와 누가복음에서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회당장은 지금으로 치면 교회의 사무장 정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당장은 당시 예배를 드리는 회당에서 예배를 주관하고, 기도와 설교 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식을 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딸이 아파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들을 낳는 예배가 아니라 죽은 예배가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예배(제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불살라 번제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온전히 되었을 때 그 삶은 산제사로 드린 것이고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은 아들을 낳아야 하는 운명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예배의 목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예배를 주관하는 회당장의 딸이 아프다는 것은 예배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딸이 아파서 죽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가진 목적의 소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딸이 아프면 자라서 아이를 낳을 여자가 되기도 전에 죽는 것인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하기도 전에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이 부탁의 말을 들으셨다고 했는데, 회당장의 딸이 아프다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기도 전애 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새 포도주가 없다는 것이며, 오직 헌 부대 곧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예배의 존재 목적이 살아 있는 예배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새 포도주가 없는 것이고, 율법을 주신 목적은 알지 못하는 헌 심령에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생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또한 생각해 보면 예배도 형식이요, 옷도 형식이요, 부대도 형식이고, 딸도 형식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목적이 표현되는 형식이다. 여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대변하고, 그렇듯 옷과 부대와 예배는 다 본질이 있으면 결정되고, 본질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서 고치시려고 길을 가시는데,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아채시고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심으로 그 병이 낫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혈루병이라는 것은, 여자가 늘 생리하듯 하는 병이다. 한마디로 잉태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상ㄷ=태, 곧 존재적 관점에서 보면 시계가 시간을 알리지 못함과 같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인의 상태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없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며 사는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죽은 상태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이 낳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라는 형식을 고치는 것에 예수님의 옷자락, 곧 예수님의 형식만 있어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모든 인생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상심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 바로 그런 마음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겠다는 여인의 마음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형식인 옷자락이라도 만져야겠다는 것은 자신은 형식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형식이라도 자신의 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원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회당이다. 그 회당이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여인의 상태이고,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곧 목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자기의 집 곧 자기 심령 안으로 부르는 사람은 이런 모든 것이 회복되고 예배도 삶도, 하나님 앞에서 여인으로서의 목적과도 같은 인생의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회당장의 집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셨을 때는 이미 그 딸이 죽어서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했을 때 다들 조롱했다. 하지만 오시는 길에 이미 혈루병이 회복되는 일을 보이셨다는 것은 소녀도 회당의 기능도 다 회복된 것이라는 의미이기에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회복된 모습을 보이기까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대기하는 상태 곧 자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딸, 곧 어린 여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목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고, 세상의 것, 곧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바로 그것이 헌 옷에 생베조각을 붙이듯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가 붙이는 것이고, 또 그것이 혈루병이나 딸이 죽은 것과 같이 여자가 잉태치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딸이 자라서 여인이 되고 그 여인이 아들을 낳음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서 그 심령이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렇게 아들의 심령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령이 그 안에 잉태되는 자리로 가야 한다. 그게 존재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회당장의 딸은 아파서 죽었다. 그 딸이 죽은 것은 달리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 안에 없으면 또한 그와 같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죽은 것인 것은 예수님이 없기 때문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만나게 되면 그것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당장의 딸과 예수님이 만나게 되면 그 딸이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스스로를 인정해야 한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그것을 인정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아들도, 또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어린 여자인 딸이 죽은 것과 같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구원할 것이가 말씀하셨고, 어린 딸이 누운 곳에 예수님을 모신 회당장도 그 딸이 회복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헌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듯, 자신의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피라미드 꼭대로 가는 것인데, 그 목적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다 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또 하나님 믿는다면 적어도 도덕적이어야지 하면서.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런 마음은 혈루병과 같이, 또 아들을 낳을 여자로 자라지도 못한 체 죽은 딸과 같은 것이다.


그런 마음, 그런 사람들은 모두 회당장과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 또 혈루병을 앓은 여인과 같이 자신이 그러함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마치 남편을 만난 여인과 같아서 우리 안에, 또 우리의 삶을 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 곧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인이 아들을 낳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고, 그렇게 되었을 대 우리 삶의 의미가 온전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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