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2-34 귀신 들린 벙어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3. 17:1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벙어리를 고치시는 장면이 기록으로 나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벙어리가 귀신 들렸다는 것이다. 이건 좀 흔한 예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귀신 들린 것과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니 벙어리가 나았다는 것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미쳤다'고 비아냥 그리는 것은 기본적인 도리를 상실했을 때 그런 소리를 한다. 즉 사람의 기본적인 의와 도리를 상실하면 미쳤다고 하듯이, 귀신 들렸다는 것, 그리고 그 귀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떠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지배해야 할 머리에 귀신이 자리하고 있을 때 귀신 들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앞에서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바다로 뛰어 들었다. 즉 귀신의 자리는 바다, 곧 세상이라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모이는 곳이고, 물은 사람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절대적인 생존 요소이다. 사람의 육신의 목마름이 그러하고, 또한 사람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갈망도 물과 같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물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닷물은 세상의 모든 물이 다 모여서 넘쳐나지만 그것을 먹으면 갈증이 더하고 결국은 그 갈증으로 죽듯이,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도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학문과 재물과 명예와 같이 넘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갈증을 해갈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하고 결국은 그 갈증으로 죽게 되는 것이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고 죄다.


그러므로 귀신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할 사람의 머리, 곧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같은 세상의 것으로 머리와 생각이 가득차서 그것을 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귀신들린 자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가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신 들린 벙어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귀신 들린 벙어리는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한 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머리와 생각과 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바닷물을 마심같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재물과 명예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이고 벙어리인 것이다.


그 귀신 들린 것과 벙어리는 어떤 상관인가?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귀신 들렸다는 것, 자신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세상에 두고 있다는 것은 사실 벙어리 정도가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인생이기도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 할 만한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기에 벙어리인 것이다.


실재로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을 두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아닌가? 그 말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는 항상 남자가 아들을 낳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의 사회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도 표현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육신으로 남자 여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이 블로그 전체를 통하여 말한 바 있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은 형식에서 비롯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같은 형식인 육신의 행함과 소유로 이루려 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최고봉이 바로 세례 요한인데, 그 세례 요한은 복음이나 말씀이 아니라 소리를 외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세례 요한도 말이 아닌 소리인데,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을 들으실 수 있는 말을 하는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 들린 것과 벙어리는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실재로 군대 귀신 들린 자 역시 무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벙어리가 다른 것이 아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벙어리가 회복 되었다는 것에서 보면 여기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하는 말을 말이라고, 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는 말, 즉 머리에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추구하는 귀신같은 가치관이 주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된 말을 비로소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귀신 들린 벙어리를 회복시킨 것이다.


사람은 서로 같은 언어를 구사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할 때가 있는 것도 그것이다. 의도되고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 소리다. 바벨탑을 쌓을 때 말을 다르게 하셨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가 달라지면 서로의 주장이 달라지고 그 말들이 의가 다르므로 달라지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아무리 언어 구사력이 훌륭해도 사람이 보실 때는 다 소리다. 게다가 그 말들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의로 여겨서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외치는 것은 다 말이 아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는데, 당연히 그런 말들은 육신은 말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벙어리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 아닌 소리를 외치는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이 보실 때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어떻게 고침을 받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고 나야 비로소 소리가 말이 되고, 귀신 들린 것 같이 세상의 것을 옳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을 하는 것이다. 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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