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5-10:15 제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4. 14:16 Writer : 김홍덕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제자들을 이때 일시에 부르신 것이라기보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 요한 그리고 마태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앞에 있기에 이 부분에서 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성에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다가 무리를 보시고 추수할 일꾼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가 아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어 보내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9-15)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매우 공격적이고, 또 능동적인 말씀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천지와 같이 어리석은 집단은 이 말씀을 그렇게 보고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추수꾼이라는 이상한 신분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에게 가라고 했다고 기존 교회에 보내고 하는데,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다.(이 멍청함은 별도로 이야기 하면 좋을 것 같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능동적인 말씀이 아니다. 아주 수동적이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는 아주 능동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는 전하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하여는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심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와서 신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너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라는 의미이지,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협박이나, '예수 그렇게 믿어서 되겠느냐?'며 심판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그 결과에 관여하려 하면 온전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결과와 결론적인 심판과 같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성급하거나 조급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복음이 옳다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제자의 삶이나, 예수님의 삶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같은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 절대로.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음이 옳다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고 심판하고 그러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는 사람이 가진 생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 역시, 이것 안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하는 사람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 사람 너머로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가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보여주는 것이었지, 사람에게 작용하거나 강요하거나 협박하거나 심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라' 했지, '그래서 되겠느냐?' 라는 식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십자가로 끌려가시기만 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가져야 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서 산다는 것, 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바로 <제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목적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거나, 아니면 너희도 기적을 일으킬 때 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기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 역시 기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문둥병, 중풍, 소경, 맹인, 귀머거리, 귀신 들린 것 그 모두는 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상태가 나타내는 증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런 각종 질병이 보여주는 증상과 같이 비정상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그러니까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회복된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떠나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 예수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하고 강퍅하게 하며, 또 심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 가서 전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를 지셨던 것 같이.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는 뭔가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다. 제자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십자가의 도와 같이, 사람이라는 실존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 마음에 스스로 찔리고, 스스로 심판하며, 스스로 돌이켜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잉태하고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 고치는 사람일 뿐, 예수님과 상관이 있고, 예수님께서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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