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16-23 핍박과 제자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6. 13:1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보내시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이 말씀, 마태복음 10장에서 16에서 25절까지에 대하여 많은 성경들이 소제목을 부여했는데 대부분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는 그 내용이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이 말씀의 의도와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사람들 특히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핍박이 있으면 예수님께서 핍박이 있다고 하신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 까지는 되는데, 그 다음에 핍박을 받는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잘 읽고 들었다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을 공회 곧 재판에 세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진 것이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한다고 시쳇말로 '마귀야 물러가라!'라며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고, 또한 중요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또 열심히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또 그 관계의 역학에 따라 손해를 보거나 그야말로 핍박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핍박할 조짐이 보이면 기도하여 그것을 이기라고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냥 사람들이 핍박을 하게 되면 너희는 공회 곧 공론 앞에 죄인이 되고, 또 채찍질 당하듯 이로 인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하시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자리에 까지 갔을 때 비로소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로서 살 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핍박의 조짐이나 실제적인 핍박 앞에 항거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에게 항거하는 베드로를 만류하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만약 이것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도 조용기 목사나 전병욱 목사와 같은 태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설사 실정법상 아무런 죄가 없는데 누군가 목사라는 이유로 그렇게 모함을 하고 있다고 치자. 그런 상황에서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냥 끌려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교회가 풍비박산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죽고자 할 때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가는 일까지 일어나고 순종했을 때 비로소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처럼 된 것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들은 실정법조차 어긴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은 이 일이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이리에게 희생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시기 때문이고, 제자라는 것이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끌려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간다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수동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송사를 당하여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끌려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할 줄 아는데 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그리스도의 정체성,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이 그런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외치듯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예수님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더니 정말이구만! 그러니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일 뿐 믿음도 신앙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법은 어떻게 보면 정아로 단순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앞에 나는 틀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다. 이것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신앙이, 하나님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라고 항거하면서 그것을 숭고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건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한 교회에 목사님과 재정담당 장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재정을 아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장로님은 교회의 재정이 여유가 없으니 돈을 규모 있게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핍박이고, 어떤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 그것은 목사님이 장로에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목사님이 핍박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또 모욕한다고 처형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많던 기적은 어디로 가고 그냥 끌려가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참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생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모르는 것이다.


핍박이라는 것이 달리 핍박이 아니다. 내가 더 온전히 아는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만약 신념을 가지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것이고, 자신의 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그 안에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들끼리 모여서 '내가 요즘 어디가 아파서…'라고 운만 띄워도 이사람 저사람 할 것 없이 그것은 어떻게 해라, 병원에 가라 등등 훈수를 놓고 자신이 그런 것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더 아프다며 떠벌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작은 일 앞에서도 죄인이 되기 싫어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는 것의 유일한 원인은 선악과다. 선악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기준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은 작은 일에도 자신이 생각할 때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작은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고,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세계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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