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23-32 포도원의 두 아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15. 16:4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왔기에 성전의 상을 엎고 무화과를 저주하느냐며 시비를 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세례요한의 권세에 대하여 반문하시고 그것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자 그렇다면 예수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답하지 않겠노라 하시고 이어서 포도원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세를 가지셨는지를 알 수 있는 비유라는 것이다.


이 포도원의 두 아들에 관한 비유는 잘 아는바와 같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첫 번째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니 첫 번째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가지 않겠다.'고 한 다음에 가서 일을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람인지를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다.


이 비유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냐?' 물었을 때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답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해 볼 것은 누가 첫 번째 아들이며, 누가 둘째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첫째 아들이고 세리와 창기가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이고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뜻은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지, 누가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포도원의 일을 좀 하라는 명령에 답을 한 내용은 표현이다. 그러니까 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을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 율법을 주신 목적으로 구분하여 본다면 이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아들과 같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는 없기에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비록 아버지에게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듯이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은 하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원래 바라던 목적인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행위를 지키는 것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와 의로 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본다면 요한의 의와 도는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일하러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하러 가는 것이듯 율법을 행위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와 의,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보기에 분하게 여기는 일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의와 도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예로 상을 엎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전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가 멍멍 하는 것은 '내가 개라는 것을 알도록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멍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라서 그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더 상세히는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냥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생명으로 살 뿐인데 그것을 보는 이들은 그것에 분개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다보니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무슨 권세로 이러냐?'하는 그 모든 행동들이 나왔을 뿐이지 그것이 '나는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보이겠다.'하며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생명이 표현되듯이 사는 삶이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을 제조하듯 율법의 의를 행위로 지켜내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이 율법이라는 기준을 먼저 떠 올리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듯 예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 행동이 어떤 힘을 믿기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그러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명의 법이 없는 자기들의 안목과 가치관으로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그 방식이라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런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행태를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세례 요한은 뭘 믿고 그렇게 했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그들의 사고방식대로 예수님께서 반문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요한이 하늘의 권세를 믿고 했다면 자기들이 요한을 믿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요한이 하늘로서 온 선지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로 비난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그들 자신의 가치관에 당한 것이다.)


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결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런 가치관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었는가 하는 것에 답하지 않으심을 보시고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권세는 믿는 구석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생명의 본능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능이 바로 권세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들들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를 원했듯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기를 바라시는데 바로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무슨 권세인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권세, 생명의 능력과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의와 도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할 때 둘째 아들과 같이 표현된 것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 만드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세리와 창녀 같은 이들은 이미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법리로 인하여 이미 죄인인 자들이다. 그러니까 의와 도는 외면하고 행동이 어떠한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인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그들은 완연한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중심만 보시는 분이다.'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는 것은 중심에 생명이 있으면 겉과 표현과 행등은 그 생명에 귀속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삭개오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난 다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속에 하나님의 의인 생명은 없으면서 행동만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다 첫 번째 아들의 모습이다. 행동이나 표현은 하나님의 생명이 안에 있어 나타나는 본성과 비하나 결국 향기 없는 꽃그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그림 안에 있는 꽃이 모양이 아무리 실물 같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듯, 행동이 아무리 거룩하고 온전해도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은 비록 둘째 아들과 같이 그 삶의 이전 표현들은 하나님을 어기는 삶과 같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들의 삶을 바꾸어 내었다. 그들이 삶을 바꾸어 낸 권세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이 거룩한 옷을 입고 그 행동과 표현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씨가 땅에 뿌려지듯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삶의 형식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권세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또한 명상이나 또 훈련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다이어트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이 먼저인 것이다. 그 목적이 사람 안에서 생명의 DNA와 같이 삶을 주관하지 않는데 방법만 바꾼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이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는데 성경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얼마간은 될 것 같다가 이내 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배다 성경 공부다 기도회다 모이고 또 나눔이라면서 신앙생활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 노력해야겠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격려하고 또 때론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그것을ㄹ 위로하는 것이 계속 반복되지만 문득 돌아보면 바뀐 것은 별로 없고 계속 노력하는 시간과 방법과 실패하고 새로 시작할 때 각오만 바뀔 뿐 본질을 바꾸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수님의 권세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결과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작은 겨자 씨 안에 새가 쉴 수 있는 큰 나무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듯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다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떠나 이 생명이 먼저 사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기도고 전도고 성경 공부고 뭐든지 그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다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이 표현된 삶의 모습이지 그런 것을 지켜낸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치관이 바로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가치관이다. 즉 뭔가 어떤 권세를 행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든 헌금이든 봉사든,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생명이 안에 있으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지 그것을 의지를 가지고 행하고 그 행한 근거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하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은 수고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권세는 생명에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권세와 예수님의 행하심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 업적을 쌓은 근거로 인함이 아니다. 바로 이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냥 첫 번째 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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