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최종 목표는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몇 일가지 않아서 오히려 예수님을 강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마음이 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한 것은 제자들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 그때까지 보여주신 능력을 가지고 해방시켜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하고 싶었고,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바다 위를 걷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로마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다. 만약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해방자로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마차를 타거나 아니면 정말로 하늘의 천군천사와 함께 입성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초라하게도 멍에 매는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새끼를 타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정체성,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남에게 대접받고 가르치는 높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에 메고서 남을 섬기는 짐승인 나귀를 타신 것이다.(타는 것은 타는 사람의 신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왕이라면 당연히 황금마차를 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더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하는 것도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선함이라는 것은 제사장과 같이 거룩한 옷을 입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금식하고 길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그래서 가난하고 죄인들이 사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했었다. 그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거저 선지자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좋고 거룩하다는 것은 단정하게 예배에 참석하고, 선한 말을 하고, 또 세상에서 가능하다면 유력하면 더 좋은 사람이 선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단정하게 입는 것과 선한 말을 하는 것과, 세상에서 유력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속이 거룩한 생명이어서 그 생명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 표현된 것인지, 아니면 속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행동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선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생명을 보지 않고,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보통의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자기 안에 거룩한 것을 표현할 생명이 있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선한 것이고, 그런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렇게 속에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여기실 생명이 없는데 모양만 거룩한 모양을 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셨고, 또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이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는 마음이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 근심하는 마음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마음이나 다 같은 가치관인 것이다. 한마디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대단히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교회의 조명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나, 시험 쳐서 얻은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지키는 거룩함이 예수님의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거룩함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지킨다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속의 기대와 안목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나귀를 타시는 것에 있다. 나귀는 가난한 사람들의 가축이고 멍에를 메는 천한 짐승이다. 제사에도 쓰이지 않는다. 그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환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마치 예수님은 화장실도 가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지금 사람들의 예수님의 거룩함이나 다 예수님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단언컨대 그것을 안다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교회를 화려하게 짓지 않을 것이다.)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함과 악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이 또 자기 맘대로 예수님을 또한 하나님을 정의 내리고 믿는 그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신 분이시다. 죄인이라서 죄인이 아니라 나귀가 멍에를 메듯 사람들이 가진 그 선악의 가치관을 가진 죄, 또 자기 가치관 안에 형상화(우상화)하는 그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가치관을 멍에를 메시듯 그 가치관이 처형하는 것에 죄인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니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힘없이 잡혀가니 강도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모든 생각의 뿌리는 선한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선은 로마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노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늘 속이려 한다. 마음에는 분이 일어나는데 교회 다니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니까 참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니까 기도한다.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그 때에 이미 사람은 화를 내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얼마간은 가능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외국 사람이 한국공항에 내리면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한다. 만약 마늘 냄새를 이기고 싶다고 이런 저런 노력을 아무리 해 본들 소용이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신도 마늘을 먹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것처럼 사람이 원래 화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화를 내는 것일 이길 수 있게 된다.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후손인 오늘날의 모든 사람은 다 옷을 입고 있다. 즉 가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을 때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부부사이나 가족과 같이 벗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관계는 서로 벗고 있어도 벗었다는 것을 책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늘을 먹은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람이 원래 화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멍에를 메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가진 멍에는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하여 규정하고, 하나님을 맘대로 정의내리는 그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다. 그 생각이 육신인 자신의 인생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 멍에를 나귀와 같이 메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더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세상이 가진 가치관,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보면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을 그 죄에서 책잡히지 않으려 애쓰면 사는 멍에를 매고 있는 인생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스스로 끌려가시듯이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인 온전한 사람이고, 그것이 산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명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인 것이고, 영생이고 생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을 감추고 참아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것을 선악과를 먹은 눈으로 볼 때 부끄럽게 여길 때는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벌거벗은 모습이 자기 모습인줄로 알고 살 때는 에덴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억제하려 살면 에덴 곧 만족이 없지만, 인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또 다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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