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9-34 맹인을 고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4. 12:2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들어가시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맹인 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맹인들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소!!"라며 소리치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민망히 여겨 그들을 고쳐 주셨다. 이 사건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주일을 보내시기 전 마지막으로 병을 고치신 사건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사건 앞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큰지를 다투었고, 그 이전에는 부자 청년이 와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지를 물었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6-28)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맹인이 나타나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이 맹인은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셨을 때에 마실 수 있다고 호언한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호기 좋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 세상에 만물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이,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이 맹인을 고치시듯 누가 큰지를 따지는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무슨 선한 일(Do)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고민하는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예수 믿어 복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생각하고,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소유와 공로의 신앙이 눈을 가려 믿노라 하는 예수님의 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을 고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자신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이 소유와 공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맹인처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기고 또 섬기려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 함이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다. 


세상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맹인이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면 컴맹이라 하고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듯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맹인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맹인들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는 들리지만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늘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예수님에 대하여 맹인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도 예수님을 믿노라 하며 일요일 아침이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지만 그들이 정말로 예수님의 본 정체성을 아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무엇을 바라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어떻게 하여야(Do)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었다면 다 맹인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인줄 알지만 그것은 정말로 맹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뭔가 행동과 힘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온 세상을 온 우주를 만드셨는데 그런 행동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또 세상을 만드셨는데 이 세상에서 난 것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왜 내가 너를 만들었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알기 바라시는 것 그것뿐인데 부자 청년처럼 자꾸 뭘 할까 고민하고, 제자들처럼 누가 더 많이 했다는 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것으로 천국에서 상급이 달라질까 고민하듯 예수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신앙이 맹인과 같이 보지 못함이고, 보지 못한다는 것은 빛이 없고 인식도 없는 흑암과 혼돈이 가득한 세계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직 창조도 되지 않은 세계이고 신앙이며 신앙세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과 같이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또 만나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본(本)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공로와 소유를 드림이 신앙이라 생각하는 눈꺼풀에 씌어 하나님도 자신의 인생도 알지 못하고 또 보고 있는 예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을 섬기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더 안다고 가르치고 책망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안다는 것은 더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로가 더 있으니, 계시가 더 밝으니 사람을 심판하고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고 또 자신의 공로의 우월감을 내세워 높임을 받으려 하는 것이 높거나 큰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높고 크다는 것은 더 가졌기에 가지지 않은 자를 위하여 수고하고, 더 밝기에 어두운 자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신앙을 가졌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목사에게 의문을 가지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며 교회에서 얼마나 비난하는가? 하지만 모르면 의심하고 신앙이 없으니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르면 모른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마귀라고 하고, 또 계시에 설사 어둡다면 어두워 그러거늘 예수님께서 맹인을 민망히 여기심과 같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고, 더 알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단언컨대 스스로 생각할 때 높은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십자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가장이 운동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사람은 언제나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온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주중이나 주말이나 개의치 않고 새벽부터 식구들을 깨워서 운동하자면 매일 끌고 나가려 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아직 운동의 중요성이 몸에 베이지 않은 가족들은 그것이 싫고 가지 않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때 가장은 자신이 가장이라는 권위와 또 운동을 해서 가족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가장으로서의 마음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고 가족들을 압박하고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실제로 이런 모습은 TV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가장이 정말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가족들이 자신을 보고 운동을 하고 싶어지도록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도록 다른 모든 것을 돕고, 또 때로는 자신이 운동해야할 시간에 가족들이 바라는 것을 해 감으로 인하여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그 마음에 감동을 받아 가장과 함께 운동하러 나서게 되는 것, 그것이 섬기는 것이고, 그것이 높임을 받기 위하여 종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례에서 가장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운동의 좋은 점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맹인이 헤매듯이 살고 있는 모든 인생들이 맹인이 보게 됨과 같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발가벗겨져서 죄인이 되어 매달리셔서 모든 것을 다 보이신 예수님과 같이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의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어떤 공로를 받치느냐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부끄럽고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노라 해도 맹인과 같이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생들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목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맹인이 보게 되듯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맹인이 눈을 뜨듯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공로와 소유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흑암과 같은 신앙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분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섬기는 것이다. 더 알기에, 온전하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맹인 같은 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정말로 예수님을 알고 영광을 얻고 싶다면 신앙이 더 좋고 계시가 밝다는 착각에 빠져서 어린 사람들에게 대접 받고 그들을 훈계하고 심판하는 높은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더 알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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