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23-30 부자와 천국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30. 10:4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낙타)가 바늘귀[각주:1]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반문이 정말 핵심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곳은 뭔가 세상에서 유력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의 마음에도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참 영원한 숙제이고 신앙의 타락이다. 어릴 적 유년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라고 노래 불렀지만 정작 사람이 살다보면 세상에서 뭔가 남다른 경쟁력과 유력함이 있다는 것 = 신앙이 좋다는 것 = 천국에 가깝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천국관과 교회관이다.


부자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자는 어떤 것으로든 세상의 법에 따른 경쟁에 이겼다는 것은 어떤 것을 패자로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이상의 훈련이나 능력이 남다르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자체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 부자인 것이다. 경쟁의 결과로 돈이든 명예든 승리의 영광이든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소득 수준의 커트라인은 얼마란 말인가?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의 구원자로 오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가난함은 육신의 경쟁에 따른 가난함이 아니다. 이것은 심령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하여 갈증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육신의 경제력이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함을 육신의 경제적 가난함, 경쟁의 패배로 인한 가난함을 보는 것은 결국 부자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역사적인 문제가 된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난감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라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심지어 세상에서 법을 어긴 죄인이라도 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 짓고 흉악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싶겠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반역 죄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니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오해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데 하나님이 고쳐야 한다고 한다거나, 공부는 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숨겨지듯 만연한 것은 세상의 이치나 법으로 무리가 있는 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에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육신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상충되게 사람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이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어떤 행동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또 뭔가 이치에 맞지 않고 나에게 손해가 될 것 같은 세상의 보편적 가치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육신은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은 지켜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있으면 지킬 수밖에 없는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모든 말씀과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유전자가 있으면 표현되는 양식들이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유전자가 있는 독수리는 하늘을 날고, 고래의 유전자가 있는 고래는 바다 속에서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유전자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없으면서 말씀을 문자로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하면 의로워진다고 하는 생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신 것이지 아무 것도 안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쫓겨난 것이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나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는 다 죽은 것이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지 않은 사람은 말씀으로 비롯된 삶과 행함이 나올 수 없으므로 당연히 죽은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그 마음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에 대하여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마음이 부자면 자신의 정체성을 갈급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이 안락하면 아무래도 영혼도 안락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뿐이지 부자라고 무조건 천국에 못 간다고 하거나, 또 부자라는 이유로 신앙 없는 죄인 취급하는 것도 다 같은 안목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부자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 가난함,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만드시고 육신으로 사는 삶을 주셨는지를 알고 싶은 갈망과 그러한 것이 자기 안에 없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이 만든 목적을 갈망하는데 기쁘지 않겠으며, 자신의 세계로 들이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갈구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일로 기뻐하실 것이며, 그 사람은 그 생명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바로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마치 천국의 DNA 보안 장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살아가는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천국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1. 이 바늘귀는 재봉에 사용하는 바늘귀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의 정식 문이 아닌 개구멍과 같은 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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