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꼭 돈이 아니라도 빚을 질 수 있고, 또 의도치 않아도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형제들에게 행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포스트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보실 때 "네가 누구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뜻하신 그 정체성을 가졌는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너는 나의 형상이냐?', '너는 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냐?', '너는 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만족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논쟁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불이 오지 않는 전구가 전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전구가 아무리 예쁘고 설사 그것이 세계 최초의 전구라 할지라도 빛이 오지 않는다면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박물관장이라면 몰라도.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체성의 자리에 없는 인생은 그가 어떤 삶을 살든지, 세상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외계인으로부터 구해진 역대 최고의 영웅이라 해도 하나님은 관심을 두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그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들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감동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순종의 마음을 가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은 인간이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일만 달란트 빚을 졌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만 달란트가 사람이 질 수(만들 수) 없는 채무임을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에 관한 빚과 그 정체성을 벗어남으로 하나님 앞에 가치 없는 죄인이 된 것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빚인 것이다. 즉 인생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의 계시가 없으면 스스로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들리게 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한 주인의 모습인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사람들의 행동에 관한 것이고, 그 판단 기준은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꼭 나라가 달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검사와 변호사가 보는 관점이 다르고, 같은 정치적 사건을 여당과 야당이 보는 것이 다르다. 다 자기가 가진 선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예를 들면서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 주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인 네가 사람의 죄를 심판하지 말고 다 용서하라는 것이다. 일흔 씩 일곱 번이 490번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말로 멍청이다. 이는 완전히 용서하라는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횟수나 시간이나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용서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아주 쉬운 것이 또한 용서일 수 있다. 용서라는 것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한 이후에 그것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용서하고 말고 할 것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에 대하여 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봤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그것을 용서해야할 일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잘못된 것을 보거나, 특히 자신이 손해를 보면 그것을 용서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용서하기 힘든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나에게 죄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런 상태가 되었다면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거나 묻어 두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보았을 때 용서할 일, 곧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수천만 번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바뀐 사람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용서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과 같이 사람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몰라서 헤매는 연고로 짓는 모든 죄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즉 일만 달란트를 빚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주인의 몫이라는 것을 아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인생이 왜 사는지를 몰라서 때로 돈에 의미를 두고 때로 권력을 좇는 사람을 볼 때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것을 감당하지 않아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 죄를 탕감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는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형상은 이미지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한 어떤 형상이 필요하시기에 그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영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영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사람의 삶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사람은 사람 스스로가 볼 때는 더럽고 연약한 이 육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육신이 보시기에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이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정체성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그 사람이라는 형식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싫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만 달란트를 갚지 못한 죄에 빠진 사람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과 의와 목적이 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인생은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인 것을 아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생명대로 살 것이고, 그 생명은 하나님과 같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다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수고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 사람이 용서 거리라도 되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돈을 좇느라 죄를 짓고, 명예를 좇느라 죄를 짓는 세상과 사람을 정죄하고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인데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오히려 부족한 것이다. 수를 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잘못했다고 보지 않는데 용서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런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일백 데나리온은 사람이 갚은 수 있고,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빚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기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사람의 선악간의 기준으로 심판한 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데 그것이 죄로 비칠 리가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과 같이 용서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몇 번이라도 참고 참으면서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도무지 사람을 볼 때 용서할 것이 없는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또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이려 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주장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듯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너의 정체성이 나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제의 죄가 용서할 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네가 그것을 지고 수용하며 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특히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다고 비유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영원히) 용서하듯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처럼 사랑하며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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