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하셔서 아담이 잠들게 한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가 아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때문인지 유대인들은 여자를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그 배필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말씀 자체로 인하여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남자 혹은 여자가 아니라 사람 전체이고, 사람이 독처하면 좋지 못하니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람은 육신으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자아다. 그리고 배필은 육신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표현하신 것이다. 즉 어떤 세계에 있어 그 세계의 의는 항상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이지만 홀로 있어 본질이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 본질을 표현할 표현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배필이고 그것이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미지를 표현할 육신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의 혈통을 나타내는 성씨는 남자의 성을 따른다. 이는 그 혈통의 정체성을 남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서 그 혈통의 정체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아들을 얻는 것이다. 즉 사람이 육신으로 이루는 가정의 혈통 곧 의와 내용은 남자에게 있고, 그 의와 내용인 혈통이 육신을 얻는 것은 여자로 얻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이다.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가 가진 의가 여자로 인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 줄기가 남자와 여자로 나타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형상과 이미지와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여자의 격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없고,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미지(형상)가 표현되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발견되어 삶의 목적과 의가 하나님에 귀속되어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자와 여자는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씨가 있는 사람 곧 남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래 창조되는 순간부터 혼자서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존재이다. 이는 피조물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생이란 항상 여자와 같은 것이다. 곧 씨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모든 인생은 다 여자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으로 표현되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육신으로 혈통의 씨를 가진 남자가 여자를 통하여 아들을 얻는 것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마음이 완악한 연고로 아내 버림을 허락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완악함,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고집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같은 것이다. 율법이 지키라고 주셨다는 것 보다, 그것을 행동으로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율법을 지키려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심과 같이, 아내를 버리는 것도 아내를 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혼증서의 규례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사람은 이혼이라는 것이 할 수 없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혼증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의 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로 써야 하는 문서를 따르는 사람, 곧 말씀을 행동과 규례로 아는 사람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혼증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는 증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결혼에 대하여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은 단순히 결혼의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이 남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성경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을 말할 때가 많다.(이는 문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이나,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역시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아내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형식, 곧 육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육신의 정체성이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기에 그 육신이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정체성과 자아 정체성이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혼이다.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이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신앙의 갈등은 사람의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다. 지금 많은 신앙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이 육신의 정체성과 사용법을 모른다. 그것이 많은 신앙적 모순과 타락을 낳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육신을 선악의 기준을 가진 인생의 안목으로 보면 늘 부정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단련하려 하면 유대인이나 이슬람이나 율법적인 신앙이 되고, 부정한 육신은 가망 없으니 버리려 하면 영지주의나 이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버리면 여러 가지 신앙의 모순을 낳게 된다. 육신의 문제, 곧 이 육신의 한계와 육신이 속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기도로 해결하려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해야지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기도를 해야만 한다고, 기도하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을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살인 해 놓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죄를 사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사과할 것이 없다고 하는 식의 신앙도 같은 것이다. 육신으로 관련된 것은 육신으로 갚는 것이다. 그게 육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고, 그것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와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내와 같은 육신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사람의 관습의 법을 만드신 것은 단순히 육신으로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인간이라는 종족을 지속하기 위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 일련의 사람의 관습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그렇게 한 몸이 되는 것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남편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내와 같고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인생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과 사람이 아내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이 결혼일진데 이혼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음은 아내가 자신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들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자기 것이 아닌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에 관해서는 굳이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셔도 되게 사람의 본성 안에 두실 것은 두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것이나 정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이라는 법을 인생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여자와 같은 육신으로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아들을 얻는 법을 보이심이다.


여자를 성경에서 세지 않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를 세지 말고 남자와 다르게 취급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 여자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를 세는 것에 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병아리를 얻기 위하여 달걀을 세는 사람이 무정란을 세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여자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위함이 본질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격인 육신을 가진 인생이 남편을 만나듯 하나님의 의를 자신이 받아 들여서 그 말씀의 씨가 자신 안에서 생명이 되어 자신의 삶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결혼해서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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