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부자가 들어가기 힘들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은 혼돈스러워졌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아 왔는데 그런 자신들은 무엇을 얻을 것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했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잡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나서 이어진 말씀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일 사람을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일할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다는 것이다. 그 집주인(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밭에서 일하라고 이른 아침, 또 삼시, 또 육시와 구시에 각각 사람을 불러서 일하게 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니 먼저 온 자들은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신들도 동일하게 받자 주인에게 "왜 일은 더 했는데 똑같이 주느냐?" 묻자 주인은 "약속한 대로 주었으니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답하였는데, 천국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상황은 제자들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지 묻는 물음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제자들도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지를 물은 부자 청년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 다닌 제자들이 설마 그렇겠는가 싶겠지만,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다음에 직접 만나보고서도 한동안 믿지 못했다. 그러니까 엠마오로 떠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 청년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비단 그들만의 생각이었고 가치관이었을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을 보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면 성경의 이 부분은 째 버리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우리와 상관이 있는 말씀이기에 오늘까지 전해지고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의 기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 들어가는지, 또 어떤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서 개털 모자가 아닌 면류관을 쓰는지가 관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관점은 이방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방신의 관점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존재의 신이신데 반해 사람이 믿고 만든 모든 이방신은 행위와 소유에 관한 신들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은 사람이 어떤 공로를 드리는지, 소유를 얼마나 드리는지에 반응하는 신이기 때문에 공로의 크기에 따라서 천국에 가고 못가는 기준이 되고, 또 가서 받을 상급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관은 전부 이방신을 믿는 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공로를 드리는지, 또 소유의 얼마를 드리는지를 살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신앙의 근간 중의 근간이고 핵심 중의 핵심인데 이것이 다 틀어져 버려서 지금 교회가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는 생명에 종속된 표현이고 결과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물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무슨 선한 일(Do)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지 묻는 청년에게 "어찌하여"라고 답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청년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나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예수님을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알고 있었다면 이 순간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답을 한다. 성경에는 그냥 사랑이지만, 원문으로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고, 베드로는 필로에(친구간의 사랑) 사랑을 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잠깐 베드로 사도를 이야기 해 본다면, 그는 정말로 열정과 따뜻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다가 여종이 '너도 그와 한 패'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그것은 자기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은 왕이 되리라 생각했고 그 많던 기적을 일으키신 자신의 주가 저렇게 아무 힘도 없이 심문 받으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예수님과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이 다른 이유를 모르겠으며, 그렇게 매 맞으시는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울었던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을 모른 체 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실제 그런 비겁한 인물이 아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대를 대상으로 칼을 휘두른 베드로가 자기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결국은 소유와 공로의 신앙에 서 있다.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고, 영원히 살 건데 기와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식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또 가진 것을 많이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떠하든지 그러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수고하지 말고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과 세계 안으로 부르시건만.


신앙은 절대로 수고한 공로에 따라 심판과 상급을 주시지 않는다. 그 객관적 기준이 있기라도 하겠는가? 사람마다 능력과 형편과 모양이 다 다르고 그런 사람들의 차이 또한 하나님이 주셨지만 객관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시지는 않았다. 주셨다면 율법이지만 율법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큰 목적이지, 그것이 천국 가는 객관적 기준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객관적 기준이면 그것으로 성공할 인생은 절대로 없다. 누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성에 대한 욕망이나 거짓말과 같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뭔가 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법을 만드는 것이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가 야옹하지 않는다고 죽일 것인가? 생명의 법은 이름이 법일 뿐 그건 누구에게도 불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하나님의 법이 바로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법으로 규정할 것이 없는 분명한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과 삶을 규정하거나, 선악 간에 판단하거나, 하나님 만드신 사람으로서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바로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삯군에게 약속한 그것이다. 여기에는 누가 얼마를 더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한 존재인지 아닌지, 그것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의 뜻에 따라 포도원의 일을 한 것이냐 아니냐하는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 어떤 공로를 세우는가 하는 것이나, 또 얼마나 많은 소유를 드렸는지 와는 무관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 양이 아니라 드리는 마음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다. 정답은 누가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대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품꾼에게 약속한 포도원 주인의 약속인 것이다. 몇 시간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포도원의 일꾼이라는 그 자체가 한 데나리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를 드렸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살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인가가 중요한 것이나,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목적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그것이 척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누가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이 좋은 신앙이 아닐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결국 나중이 될까 싶어 염려하기 때문에 이 성경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사고 자체가 이미 공로의 크기를 따지는 상대적 가치이고, 또 다른 상대를 이겨야 좋은 것이 되는 피라미드적인 가치관이다.


먼저 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의 존재 목적에 순종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 개념으로 보면 먼저라는 기준이 크로노스적[각주:1]인 시간 개념을 가진 사람에서 결국은 카이로스적[각주:2]인 시간 개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간 개념이 크로노스적이라는 것은 그 가치관이 세상적이고 상대적이며 이원론적이고 피라미드식인 가치관이 가진 시간 개념이다.


그러므로 누가 좋은 신앙인가? 아니면 어떤 신앙이 좋은 신앙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분량에 충실한 사람이다. 가정에서 망치와 숟가락은 사용빈도와 두는 장소가 전혀 다르다. 그런데 망치가 사용빈도를 기준으로 자신이 숟가락 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가치관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 많이 하면 천국에 가서 기와집에서 황금 면류관 쓰고 살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가치관이다.


그러나 망치는 망치의 일이 있다. 그것에 충실하면 그것이 먼저 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숟가락이 아무리 자주 사용되어도 누룽지 긁고 있다면 어쩌다 못 박을 때 못 잘 박는 망치보다 못한 것이다. 그게 더 좋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서에서 바울 사도가 몸의 각 지체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달력과 같은 객관적 시간으로 먼저였던 것이 객관적으로 나중 된다는 것이 아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될까 염려하는 사람이 바로 객관적인 가치관과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치관은 부자 청년과 같이 '무엇을 하여야?' 라는 생각을 가진 가치관이고, 살 동안 공로를 쌓아야 천국에 가서 잘 산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안목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공로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고 해도 결국 목적을 깨달은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이 뜻하시는 바이다.


  1.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은 12시가 점심시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카이로스적인 시간 개념은 생명의 시간 개념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로 점심 시간은 12시가 아니라 배고픈 때 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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