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다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세베대의 아내)가 와서 예수님께서 나라를 이루면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이다. 이런 시점이 되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실제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백성들이 환호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미실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하시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호기 좋게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었다는 것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세베대의 아내이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가진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에 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고, 아프지 않고, 자식들 시험에 붙기를 바라는 생각들이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그 혜택을 받기를 원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복과 세상 부와 세상 명예의 주인이 바로 이 땅 위의 왕이다. 즉 예수님께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주관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고, 그 혜택을 보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을 누리는 자격은 당연히 세상적인 가치관인 공로와 소유를 드림의 정도로 가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위의 것을 관장하는 왕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정체성, 곧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전하러 오신 분이시고, 돈과 명예와 육신이 살면서 필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필요할 때 사용되는 도구와 같은 것이지, 신앙이 좋아서 부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척도나 또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나의 잔>은 각오가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예수 믿기 위하여 십자가에 발가벗고 못 박히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을 주장할 때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죽이려는 것에 순종하신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살면서 하나님 아는 제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세상의 왕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공로로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십자가를 얼마나 졌고, 얼마나 무거운 것을 졌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졌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선악 간에 판단하는 사람들이 너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할 때 달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그럴 수 있는 생명이 있느냐, 그런 본능이 있는 생명이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될지를 묻는 청년의 가치관과 같은 가치관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를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반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는 천국에서 어디에 앉는지, 어떤 상급을 받는지를 관심을 가지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의 의에 맞는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온전한 사람이 모르는 사람의 주장 아래로 가는 것이 섬기는 것이고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또 모욕한다고 죄를 씌우는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이 바로 섬기는 것이고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잔인 것이고, 또 오늘 우리가 마실 잔인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 같이 예수님이 세운 나라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높은 자리에 앉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우선은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이고, 높은 자리가 있고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피라미드와 같은 가치관으로서 세상적인 가치관이며, 그것은 어떤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경쟁은 생명이 아니라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는 경쟁을 말하며 그것에서 이긴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경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은 각 생명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새가 하늘 나는 것으로나 물속에서 사는 것으로 경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생명은 그렇지 않다. 생명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모두가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이지 새와 물고기 중에 어느 것이 잘한다고 상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명의 본성은 자신이 얼마나 그 생명으로 살았는지, 그 생명으로 얼마나 다른 생명보다 수고했는지를 따지지 않듯이 그냥 자신의 생명의 본성대로 시절에 맞추어 표현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느냐를 경쟁하거나 얼마나 무거운 것을 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상황이 되기만 하면 십자가를 지는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것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 사람이 자신에게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나를 죄인 삼으려 할 때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감히?'라든가, '사탄아 물러가라!' 같은 푼수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는 그런 모습이 바로 섬기는 모습이고 종이 되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더 알고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영광을 얻는 것이 천국의 법이 아니라 더 알고 더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수고하기 위하여 주어진 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마신 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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