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인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물었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선한 일을 왜 묻느냐고 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청년은 영생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찌 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당연히 선하신 분이고, 그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하고, 또한 예수님께 선한 일을 물었는데 좋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까칠하게 반문하셨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선에 대한 기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젊은 관원은 선이 행함(Do)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에 들어가나요?>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또한 예수님께 선한 일을 묻는 것은 그의 눈에는 예수님이 선한 이유가 예수님의 행위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행동(Do)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어떤 선한 일을 행(Do)을 한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 청년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 교회에 와서는 늘 묻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하는 것을 묻고, 또 강단에서는 그런 것을 설교한다. 그것이 바로 이 부자 청년의 안목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며 반문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행동은 생명체의 특징이다. 생명이 있어 행동이 나온다. 부자 청년의 눈에 보인 예수님의 모든 선한 행동은 그 행동이 선함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선함의 본질이고, 그 선한 생명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한 행동인 것이다.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잘못된 것을 바로 하시는 본성이 있어 병자를 고치시고, 그 생명이 표현되니 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생명만 있으면 계명도 지키는 자가 되고, 사람의 모든 영적 치유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자 청년이나 오늘날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해야 복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며,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은 선한 행실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의 근본인 그리스도의 생명,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근심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으로 고민하는지 교회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그러면 가서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를 좇으라고 어딘가 연결점이 부족한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함의 집약체가 바로 재물이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노력의 가치를 대변하는 대명사(代名詞)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부자라는 것은 그가 행위로 쌓은 것이 많고 그것에 선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묻는 청년에게 그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사실 그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켰다고 예수님께 말한 그 모든 계명들은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의 표현이 아니라, 행동만 따라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재물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화려하게 그려진 꽃이나 심지어 사진이나 동영상도 향기가 없기에 그것은 꽃그림일수는 있어도 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탈무드에는 한 부자가 늙어서 얻은 아들이 장성하기 전에 죽게 되자 유언으로 아들에게는 딱 하나의 아버지 재산만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모든 재산은 한 종에게 다 주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들이 장성해서 경제력을 행사하려고 보니 모든 재산은 다 한 종에게 주고 자신은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그 종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그 종만 있으면 모든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계명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하나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계명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특성이 나타날 때 보이는 일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보시는 유일한 기준이기에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선의 기준만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행동이 선하다고 선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행함으로 부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서 아들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의 기준이라는 것이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아들이 공로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가? 아들은 생명으로 낳는 것이고, 생명이 아들이 되고, 그 아들의 모든 행동이 다 아버지가 볼 때 선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선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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